성능 압도적이거나, 가격 합리적이거나
‘온 디바이스 AI’ 덮친 칩플레이션
소비자 가격 심리적 저항선 넘어
교체 주기 늘어나며 성장률 정체
성능 향상만으론 선택받지 못해
상생 위한 기술적 균형점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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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 스마트폰 300만 원 시대. 이제 최신 스마트폰 한 대 가격은 웬만한 대형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필수 가전제품 가격과 맞먹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일상 속에서 편하게 사용하기만 했던 스마트폰이 어느덧 주방의 대형 냉장고만큼이나 모시기 어려운 ‘초고가 가전제품’이 돼버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원인은 명확합니다. 첨단 인공지능(AI) 기술이 모바일 생태계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역설적이게도 하드웨어 가격을 천정부지로 끌어올리는 ‘칩플레이션(Chipflation·반도체와 인플레이션의 합성어)’ 현상이 본격화됐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가격 폭등을 견인하는 가장 강력한 핵심 동력은 단연 ‘온 디바이스 AI’의 확산입니다. 과거의 AI 서비스가 거대한 클라우드 서버를 거쳐 처리됐다면 최신 스마트폰들은 기기 내부에서 복잡한 대규모언어모델(LLM)을 직접 구동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실시간 통역, 고성능 이미지 생성, 개인 맞춤형 비서 기능 등을 매끄럽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성능을 비약적으로 향상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 초고성능 AP를 제조하는 비용이 천문학적 수준으로 치솟았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글로벌 모바일 AP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설계 기업들의 최신 칩셋 가격이나 미세 공정을 독점하고 있는 글로벌 파운드리 기업들의 제조 단가는 매년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AI 연산을 매끄럽게 처리하기 위해 필수적인 고성능·고용량 저전력 모바일 D램(LPDDR)의 탑재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스마트폰 부품 원가(BOM)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이 됐습니다.
부품 원가의 상승은 필연적으로 최종 소비자 가격의 인상으로 이어집니다. 과거 플래그십 스마트폰의 심리적 저항선이던 100만 원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입니다. 이제는 최상위 모델의 경우 200만 원을 훌쩍 넘어 300만 원 선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소비자들이 느끼는 체감 물가 압박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뜩이나 고물가, 고금리 기조가 장기화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가처분 소득이 줄어든 상황에서 스마트폰의 가격 대폭등은 가계 경제에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고도화된 AI 기능을 적용하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구치자 시장에서는 심각한 소비 위축 현상이 관측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징후는 스마트폰의 ‘교체 주기 연장’입니다. 과거에는 2년 약정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최신 기기로 전환하던 소비자들이 이제는 3년, 또는 4년 이상 기존 기기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향이 뚜렷해졌습니다. 성능이 조금 좋아졌다고 해서 수백만 원을 선뜻 지불하기에는 기회비용이 너무나도 크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러한 교체 주기의 장기화는 글로벌 스마트폰 출하량의 정체 혹은 감소로 이어지며 공급망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습니다. 시장조사기관들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률은 이미 성숙기를 지나 하락 곡선을 그리거나 정체돼 있으며 혁신적인 프리미엄 폰조차도 얼리어답터 중심의 제한된 수요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소비자가 지갑을 닫으면서 제조사들은 마케팅 비용을 늘려야 하고 이는 다시 수익성 악화로 이어져 차세대 기술 투자 재원을 갉아먹는 악순환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칩플레이션’발 가격 인상이 스마트폰 제조 생태계 전반의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는 점입니다. 글로벌 리딩 기업처럼 브랜드 가치가 높고 충성 고객층이 두터운 제조사들은 가격 인상분을 일정 부분 소비자에게 전가하며 버틸 수 있지만 중저가 기기를 주력으로 삼는 중소 제조사나 신흥국 시장 기반의 기업들은 직격탄을 맞게 됩니다. 가격을 올리면 즉각 수요가 급감하고 올리지 않으면 적자를 면치 못하는 벼랑 끝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중저가 라인업의 부실화를 초래해 합리적인 가격에 스마트폰을 이용하고자 하는 일반 서민층 소비자의 선택권을 극도로 제한하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물론 반도체 및 스마트폰 제조업계도 이러한 위기감을 인지하고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습니다. 공정 효율화를 통해 칩 생산 단가를 낮추려는 고도의 기술적 노력은 물론이고 하이브리드 AI 모델을 도입해 기기 자체의 부품 스펙 요구치를 다소 낮추는 대안도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모든 연산을 스마트폰 내부에서 처리하는 대신 가벼운 작업은 온디바이스로 처리하고 무거운 연산은 효율적인 클라우드로 분산시켜 부품 원가 상승 압박을 제어하겠다는 구상입니다.
또한 제조사들은 소비자의 구매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중고 보상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하거나 구독형 렌털 서비스 등 금융 결합 상품을 대거 출시하며 소비 문턱을 낮추기 위한 고육지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후 처방적인 마케팅 전략이 치솟는 원가 상승과 그에 따른 소비 심리 위축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시각입니다. 핵심은 소비자가 수백만 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반드시 ‘이 AI 스마트폰을 사야만 한다’는 압도적이고 치명적인 사용자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현재 시장에 출시된 온디바이스 AI 기능들이 대중에게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 칩플레이션에 직면한 소비자들은 차갑게 돌아서서 기존 기기에 안주하는 선택을 지속할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AI 스마트폰 시대는 고비용이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성장과 정체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기술은 눈이 부시도록 빠르게 진보하고 있지만 그 대가가 대중의 경제적 현실과 멀어질 때 시장은 늘 ‘외면’이라는 냉혹한 성적표를 던져왔습니다. AI 기술이 진정한 대중적 혁신으로 거듭나려면 단순히 성능의 한계를 뚫는 것을 넘어 소비자가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비용 구조를 마련하는 지혜가 절실합니다. 가격표 앞에서 망설이는 오늘날 칩플레이션의 그늘을 걷어내고 소비자와 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진정한 ‘기술적 균형점’이 어디인지 우리 모두가 깊이 고민해 봐야 할 때입니다.
필자 안서진은 매경AX에서 산업 분야 취재를 담당하는 기자다. 모바일·항공·반도체 등 우리 경제에 밀접한 소식을 취재해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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