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텍제국 이전 원형 문명 도시 로마제국 발흥 시기에 이미 존재 정치·종교·교역·군사경제 복합체 전쟁 통해 신에게 바칠 희생자 확보 종교를 정치권력 정당화 수단으로
얼마 전까지 멕시코가 우리나라 언론에서 자주 오르내렸다. 2026년 월드컵 예선전이 수도 멕시코시티를 포함한 두 도시에서 진행됐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호에서는 대항해 시대 초반 유럽인에 의해 멸망한 아즈텍제국에 대해 살펴봤다. 16세기 중반 아즈텍제국은 비록 스페인 코르테스에게 무릎을 꿇었으나 매우 발달한 문명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문명의 형성과 발전이 하루아침에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고려할 때, 자연스럽게 아즈텍제국 이전 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에는 어떠한 문명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때 십중팔구는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원형에 해당하는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신전 유적지를 주목하리라 생각한다.
오늘날 멕시코시티 북동부 50㎞ 지점 고원지대에는 인간 문명이 남긴 가장 압도적인 고대 유적 중 하나가 버티고 있다. 바로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테오티우아칸이다. 이곳은 거대한 피라미드와 직선으로 뻗은 제례용 도로, 그리고 수많은 신전과 궁전의 흔적으로 수놓아져 있다. 유럽에서 로마제국이 발흥할 시기에 이미 존재한 이곳은 한때 인구 10만 명 이상을 자랑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그러나 이 도시를 건설한 민족은 누구였는지조차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래전 폐허가 된 이 도시를 발견한 후대의 아즈텍인은 경외심 속에서 이곳을 ‘신들이 태어난 곳’이라는 뜻을 담아 ‘테오티우아칸’이라고 불렀다. 코르테스의 아즈텍제국 정복 이전에 중앙아메리카 문명들은 기이하게도 제대로 된 문자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이 거대 도시의 진짜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학계 통념에 따르면 테오티우아칸은 기원전 1세기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서기 100~250년 무렵 대규모 건축 사업이 집중적으로 진행됐다. 자연 발생적으로 성장한 도시가 아니라 처음부터 정교한 계획하에 건설된 거대한 격자형 도시였다. 도시 중심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일명 ‘죽은 자의 길’은 약 4㎞ 길이에 그 폭만 40~100m에 달한다. 이 직선 도로를 중심으로 신전, 광장, 궁전, 그리고 주거지가 정연하게 배치됐다.
그렇다면 기원전 원주민들은 도대체 왜 이토록 거대한 도시를 세웠을까? 이는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철저히 종교적·정치적 목적 아래 설계된 국가 프로젝트였다. 동시에 군사적 힘을 과시하는 상징 공간이기도 했다. 고대 메소아메리카 세계에서 종교와 국가권력은 분리되지 않았다. 신을 지배하는 자가 곧 인간 세계를 지배했다. 따라서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일은 단순한 건축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우주 질서를 통제하는 존재’라는 정치적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테오티우아칸의 도시 구조는 천문학 지식 및 종교적 상징체계에 따라 설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건축물은 특정 천체의 움직임과 정렬되도록 배치됐다. 특히 피라미드는 인간 세계와 신의 세계를 연결하는 인공 산으로 인식됐다. 중앙아메리카문명에서 산은 신성한 장소로서 비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생명의 원천이자 동시에 저승과 연결된 통로를 의미했다. 피라미드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우주의 구조를 재현한 성소(聖所)인 셈이었다.
사실상 테오티우아칸은 경제적으로도 번성한 도시였다. 이 지역은 흑요석의 주요 산지와 가까웠다. 이 광물은 당시 중앙아메리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물자 가운데 하나였다. 철기가 없던 메소아메리카에서 흑요석은 칼날과 창촉, 특히 제사용 도구 제작에 필수 물품이었다. 전성기에 테오티우아칸은 종교 중심지인 동시에 거대한 교역 도시이자 군사경제의 복합체였다.
그렇다면 도시는 전체적으로 어떠한 구조를 지니고 있을까? 현재 테오티우아칸의 중심에는 거대한 ‘태양의 피라미드’가 버티고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와는 달리 정상부가 싹둑 잘린 모양의 이 건축물은 서반구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고대 건축물 중 하나였다. 평평한 정상부에서는 인신공양 제사와 천문 관측, 그리고 정치적 의식 등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약 66m의 높이에 밑변 길이는 220×230m에 달했다. 무려 총 300만 톤에 달하는 거대한 돌과 흙을 층층이 쌓아 올린 구조였다. 당대인은 이 거대한 구조물을 철제 공구나 바퀴 달린 운반수단조차 없이 건설했다. 수많은 노동력이 동원돼 체계적으로 공사가 진행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테오티우아칸의 ‘달의 피라미드’.
하늘에서 내려다본 ‘달의 피라미드’ 모습.
‘죽은 자의 길’ 북쪽 끝에는 속칭 ‘달의 피라미드’가 버티고 있다. 높이는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낮지만 주변 지형과 어우러지며 위압적 인상을 풍긴다. 달의 피라미드는 수차례 증축됐는데, 그때마다 대규모 인신공양 제사가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십 명의 희생자가 매장된 흔적이 발굴을 통해 확인됐다. 일부는 손이 묶인 상태였고, 일부는 참수된 모양새였다. 또 다른 일부는 살아 있는 상태에서 매장된 것으로 짐작된다. 희생자 대부분은 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로 여겨진다.
이러한 희생 의식은 단순한 잔혹 행위가 아니었다. 메소아메리카 세계관에서 인간의 피와 심장은 우주 질서를 유지하는 일종의 연료였다. 태양은 인간의 희생 덕분에 움직인다고 믿었기에 제사를 중단하면 세계가 멸망할까 봐 두려워했다. 따라서 전쟁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신들에게 바칠 희생자를 확보하기 위한 종교적 행위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테오티우아칸은 단순한 종교 도시가 아니라 ‘전쟁 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실제로 유적 벽화와 조각에는 창과 방패를 든 전사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피라미드 신전 내부에 그려진 벽화.
이미 테오티우아칸 시대부터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전쟁과 제사를 결합하고 있었다.
테오티우아칸은 4~5세기에 절정기에 달했다. 당시 이 도시는 중앙아메리카 최대의 정치·경제·종교 중심지로서 그 영향력은 현재 과테말라 지역까지 미쳤다. 실제로 마야 도시들에서도 테오티우아칸 양식의 벽화와 무기, 건축 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문화 교류를 넘어 정치·군사적 영향력이 미쳤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거대 도시도 6~7세기경 결국 몰락했다. 장기간에 걸친 가뭄과 그로 인한 경제 붕괴, 계급 갈등, 정치적 혼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멕시코 국립인류학 박물관.
테오티우아칸 유적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중남미 원주민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특히 전쟁사 관점에서 볼 때 이 도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대 국가들은 단순히 무력을 통해서만 지배하지 않았다. 간혹 거대한 상징을 통해 권력을 표현해 왔다. 그들은 웅장한 건축물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압도했고, 종교의식을 통해 폭력을 신성화했으며, 희생 제사를 통해 정치권력을 정당화했다. 방문객은 테오티우아칸이야말로 우리 인류사에서 그러한 통치체계의 가장 오래되고도 장엄한 사례 가운데 하나임을 실감할 수 있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이내주는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이자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