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르완다 ①
100일간 80만 명 이상 희생
기념관엔 참혹한 흔적 생생
‘세계문화유산’ 지정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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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는 1994년 인구의 10%가 학살당한 끔찍한 내전이 있었지만, 현재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나라다. 국토면적 2만6000㎢(우리나라 경북 크기), 인구 1447만 명, 연 국민개인소득 1200달러, 군사력은 약 3만5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르완다군은 실전 경험과 엄격한 군기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로 알려져 있다.
청결하고 공해 없는 언덕의 도시 키갈리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Kigali). 에티오피아·케냐·우간다의 어느 도시보다 깨끗하다. 30여 년 전 핏빛으로 물든 광란의 현장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르완다는 현재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로 불리며 기적 같은 반전을 보여주고 있다. 키갈리 여행객이 가장 먼저 놀라는 것은 “쓰레기와 매연이 없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산 능선을 따라 오밀조밀하게 형성된 키갈리는 한 폭의 그림이다. 처절했던 내전을 상상하며 혼자 골목길을 걸으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활짝 웃는 아이들과 친절한 주민들로 그 상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든 르완다인 가족사에는 내전의 상흔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나라 국민들은 이웃을 용서하고, 그날의 비극을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체질화돼 있다.
벨기에 식민정치가 남긴 분열의 씨앗
1994년 4월부터 약 100일 동안 르완다에서는 80~100만 명이 집단 학살당하는 끔찍한 인종청소가 있었다. 이 학살극은 단순한 ‘원시적 부족 갈등’이 아니었다. 벨기에 식민지배와 권력층의 선동이 결합한 조직적인 범죄였다. 르완다는 다수파 후투족(85%)과 소수파 투치족(14%)이 비교적 평화롭게 섞여 살았다. 그러나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르완다는 벨기에의 식민지가 됐다. 식민정부는 통치 목적으로 코의 길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두 부족을 엄격히 나눴다. 신분증에도 종족을 명시했고, 소수인 투치족에게만 교육 특혜를 줘 다수인 후투족을 지배하도록 했다. 그 결과 두 부족 사이에 깊은 증오심은 쌓여만 갔다. 1962년 벨기에로부터 르완다는 독립했다. 이번에는 거꾸로 인구가 많았던 후투족이 정권을 잡았다. 이때부터 투치족에 대한 보복과 차별이 시작됐다. 수많은 투치족이 이웃 나라로 탈출해서 ‘르완다 애국전선(RPF)’이라는 반군을 결성했다. 사실상 두 부족 간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인종청소’의 도화선, 대통령 암살사건
1990년대 초 르완다의 주 수출품인 커피 가격이 폭락했다.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사회적 불만이 극에 달했다.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인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원인 불명의 미사일에 격추당했다. 극단주의 세력은 이를 투치족 소행으로 몰아붙였다.
지금까지도 정확한 배후가 밝혀지지 않았다. 후투족의 정치인·군부·민병대는 투치족을 뱀으로 묘사했다. 심지어 라디오 방송은 “바퀴벌레 투치족을 처단하라”는 메시지를 24시간 내보냈다. 선동에 눈이 먼 이웃이 이웃을, 심지어 후투족 남편은 자기가 살기 위해 투치족 아내를 죽여야만 하는 광기의 100일이 이어졌다. 이 비극은 1994년 7월, 투치족 반군 지도자 폴 카가메가 수도를 탈환하면서 가까스로 멈췄다. 그러나 그 대가는 처참했다. 수십만 명의 여성이 성폭행당해 에이즈 감염률이 폭증했다. 수많은 가장이 사망하면서 르완다는 거대한 보육원과 과부의 나라가 됐다. 투치족 반군이 승리하자 이번에는 보복을 두려워한 후투족 난민 200만 명이 이웃 나라로 피란을 떠났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학살 기념관’
키갈리에서 편리한 교통수단은 ‘보다보다(Bodaboda)’라는 오토바이 택시다. 운전기사들은 형광 조끼를 입고 곳곳에 대기하고 있다. 오토바이를 이용해 ‘대학살 박물관’을 찾아갔다. 기념관(Kigali Genocide Memorial)은 2층으로 규모는 크지 않다. 1층 전시실은 평화로웠던 공동체 모습에서 시작, 벨기에가 어떻게 부족 분열을 조장했는지를 짚어준다. 이어지는 공간에는 학살 당시 사용된 몽둥이, 낫, 쇠스랑, 정글도 등 동원된 모든 살인도구가 전시돼 있다. 피 묻은 옷가지와 수많은 유골도 그대로 널려 있다. 그 유기물마다 도끼에 찍힌 자국, 총탄 구멍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당시의 참혹함을 보여준다. 벨기에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있었지만, 그 살인광란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벨기에군 10명이 민중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투치족이 유일하게 도망할 수 있는 곳은 교회당이었다. 성직자 제지에도 불구하고 집중사격과 방화로 피란민은 떼죽음을 당했다.
흐느끼며 관람하는 아동피해 전시실
2층 ‘아동실(Children’s Room)’ 관람객은 흐느끼거나 전시실을 뛰쳐나오기도 한다. 진열장에는 학살당한 아이들의 대형 사진과 마지막 순간이 담담한 문체로 적혀 있다. 살해당한 생후 10개월 다윗(David)의 기록이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어머니 모유였고, 엄마 품 안에서 잘 웃던 아기였다. 그 갓난아기는 머리가 벽에 부딪히면서 깨져 목숨을 잃었다. 여섯 살 소녀의 절규도 남아 있다. “엄마, 나 착하게 살 테니까, 제발 살려달라고 저 아저씨한테 말해줘”라고 울부짖었다. 소녀는 도끼에 난도질당해 죽었다. 소녀를 살해한 남자는 평소 잘 따랐던 이웃집 아저씨였다. 2층 출구에는 유대인 학살, 캄보디아 킬링필드, 발칸반도 인종청소 등 인류사적 집단학살 전시실이 있다. 반복되는 반인류적 대학살극을 되새기며 르완다 비극이 인류 전체의 숙제임을 환기시키고 있었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는 조선대 초빙교수, 충남대·국간사 외래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세계의전사적지를찾아서』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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