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친 잃은 슬픔, 충무공 통곡이 서린 ‘해암’

입력 2026. 07. 09   15:54
업데이트 2026. 07. 0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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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게바위’ 

무사고 기원 해신당 당제 열리던 곳
변씨,여수서 아들 만나러 오다 숨져
옆엔 어머니 향한 장군의 친필 석비
애통한 마음 난중일기에 고스란히

충남 아산시 인주면에 있는 게바위.
충남 아산시 인주면에 있는 게바위.

 

게바위 옆에 세워진 충무공 이순신의 친필 석비. ‘대설국욕’ ‘모야천지’란 글 속엔 어머니에 대한 충무공의 마음이 담겼다.
게바위 옆에 세워진 충무공 이순신의 친필 석비. ‘대설국욕’ ‘모야천지’란 글 속엔 어머니에 대한 충무공의 마음이 담겼다.

 

게바위에서 바라본 곡교천과 서해가 만나는 지점. 지금은 삽교호방조제가 들어서 있다.
게바위에서 바라본 곡교천과 서해가 만나는 지점. 지금은 삽교호방조제가 들어서 있다.


충남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 들판에 ‘게바위’가 있다. 자연석들이 무더기를 이뤄 게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에는 한자로 ‘해암(蟹巖)’과 ‘게바위’라는 명칭이 병기돼 있다. 원래 바위는 삽교천방조제 준공으로 매몰되고 근처에 있던 이 바위가 비슷한 모양 덕에 원 이름을 계승해 오늘에 이른다. 1979년 10월 이전까지 게바위나루는 삽교천 하류에서 강을 건너는 나루터이자 서해로 나가는 포구 기능을 했다. 게바위는 해난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던 해신당(海神堂) 당제(堂祭)가 열리던 신성한 곳이었으나 주로 배 정박용 밧줄을 묶는 데 사용됐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구보는 1597년 4월 어느 날 이 포구로 들어왔던 배 한 척을 떠올린다. 여수에서 태안을 거쳐 게바위나루에 닻을 내린 배에는 목관이 하나 실려 있었다. 입관된 이는 82세로 생을 마감한 초계 변씨(1515~1597).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모친이었다(『아산시지』).

한 달 전이던 3월 4일 전라좌수사이던 이순신은 왕명거역죄로 의금부에 투옥된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으로 온다’는 첩보에 대응하지 않은 데 따른 처벌이었다. 이순신은 첩보가 적의 유인책임을 간파해 출전하지 않았지만(『선조실록』 『징비록』) 그를 시기하던 경상우수사 원균이 ‘전투 기피’로 상소했다. 선조의 신망이 두텁던 우의정 정탁(1526~1605)의 구명 덕에 이순신은 가까스로 사형을 면했다(『선현유적』 『이충무공전서』). 이순신이 혹독한 고문을 받자 “잘못이 분명하나 기왕의 공적이 크고 향후에도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호소한 정탁은 타이밍의 절묘함을 안 노련한 인물이었다고 구보는 평가한다. 선조의 분노가 어느 정도 해소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용서를 청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몸이 부서진 채 4월 1일 풀려나 백의종군길에 오른다. 백의종군이란 ‘벼슬 없는 신분으로 군영에 복무하는 것’인데, 지금의 종각역 일대에서 출발해 도원수 권율의 진영이 있던 합천까지 640㎞를 이동해야 했다. 4월 13일 합천으로 이동 중이던 그 길 위에서 모친의 부음을 접했다. 이순신은 아산으로 달려가는 내내 통곡을 멈추지 못했다. 추락한 자신의 처지가 겹쳐진 까닭이었을 터이다.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난중일기』).”

이순신은 게바위 나루에서 오열 속에 모친의 주검을 맞이했다. 관을 아산 본가로 옮겼으나 백의종군 중인 죄인의 신분이던 그에게 오래 슬픔에 잠길 시간은 허용되지 않았다.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다시 남쪽의 근무지로 떠나야 했다. 며칠 뒤인 4월 19일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서 죽느니만 못하구나.” 일기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두 형 희신과 요신이 꿈에 나타나 어머니의 임종과 장례를 함께하지 못한 일을 두고 서로 붙들고 통곡했다는 기록도 담겨 있다. 효심이 각별한 이순신은 자신 탓에 어머니가 운명을 달리하셨다고 자책했을 터였다.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서울 인현동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을 보내다가 스물한 살에 아산의 부호인 무인 방진의 외동딸과 혼인하면서 아산에서 지냈다. 31세이던 1576년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처가가 있던 염치읍 백암리 일대는 장인 사후 이순신의 본가가 됐다. 현재의 현충사 지역이다.

모친 변씨는 아들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 아들을 따라 거처를 여수로 옮겼다. 전쟁이 임박한 시기에 멀리 있는 노모가 아들의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아들 가까이로 내려온 것이었다(『초계 변씨의 삼천지교』). 여수의 고음내 자락이었다. 현재의 여수시 웅천동인 이곳에는 지금도 이순신 자당기거지(慈堂寄居地·어머니가 계시던 곳)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아들이 문안을 드리러 올 때마다 변씨는 오래 붙잡지 않고 등 떠밀어 서둘러 보내곤 했다.

『난중일기』에는 어머니를 향한 이순신의 마음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1593년 6월 12일의 일기에는 흰 머리카락을 뽑았다고 적었는데, 그 이유를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변씨는 아들이 죄인의 몸이 돼 한양에서 옥살이를 하게 되자 여수를 떠나 배편으로 아산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아들 가까운 곳에 있고 싶은 모정의 발로였다. 고령이라 배타기가 위험하다는 주위의 만류가 있자 변씨는 ‘관을 짜서 함께 실으라’고 이르고선 승선을 결행했는데 결국 그 관에 눕고 말았다.

게바위 옆에는 충무공의 친필, ‘대설국욕(大雪國辱)’과 ‘모야천지(母也天只)’를 새긴 두 개의 석비가 서 있다.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는 뜻의 ‘대설국욕’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이던 1594년 설날 한산도에서 군사훈련과 작전을 마치고 1월 11일 여수 본영으로 돌아와 잠시 모친에게 들렀을 때 병석에서 아들을 떠나보내며 당부한 말씀이었다(『난중일기』). ‘모야천지’는 ‘어머니는 하늘 같은 존재’라는 뜻으로, ‘천지(天只)’는 충무공이 모친을 지칭한 말이었다. 『시경』에서 따온 이 표현은 ‘오직 하나뿐인 하늘’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이순신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하늘이 어머니였음을 알게 한다. ‘천지’ 언급은 『난중일기』 전체에서 119회에 이른다(국가유산청). 구보는 충무공의 전쟁이 그만큼 고독했음을 읽는다. 이순신을 젖히고 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은 1597년 7월 적의 유인계에 속아 부산포와 거제 칠천량에서 대패하고 자신도 쫓기다 전사했다. 수군 지휘권은 다시 이순신에게로 넘어왔다. 남은 배는 12척이었다(『선조실록』 『징비록』).

지금의 게바위는 본래의 자리에서 조금 옮겨졌지만, 이곳에 깃든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매년 5월 아산시와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보존회’는 이곳에서 ‘정경부인 초계 변씨 추모제’를 올린다. ‘백의종군길’ 답사 코스에도 포함시켰다.

구보는 게바위에 서서 멀리 곡교천이 서해와 만나는 광경을 바라보며 저곳으로 들어왔을 그날의 돛단배와 가슴을 치며 모친의 주검을 맞이했을 충무공을 생각한다. 권력 모리배들은 타인이 겪을 불행이나 국가의 안위는 외면한 채 자신의 영달만을 도모했음을 아프게 확인한다. 어쩌면 하늘이 나라를 위해 쓰임이 남은 아들 대신 어머니의 생명을 먼저 거둬 간 것일지도 모를 일이라 여긴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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