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향연 맡는 예술

입력 2026. 07. 09   16:10
업데이트 2026. 07. 09   16:26
0 댓글

선 넘은 미술 ⑦ - 향

기억과 감정 불러일으키며 심리적 감각 자극
작품·공간에 향 설치해 감각적 체험 강화
단순히 보이는 것 넘어 ‘경험 과정’ 예술로 확장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향. 필자 제공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향. 필자 제공



미술관에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하얀 벽면에 은은한 조명, 전체적으로 깔끔한 공간으로 연상되는 전시 공간은 왠지 향기마저 쾌적할 것 같다. 하지만 가만히 코를 킁킁거려 보면 새로운 전시를 열기 위해 막 조성이 완료된 공간에서 나는 페인트 냄새, 벽에 걸린 회화의 오래된 물감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 녹슨 청동에서 배어 나오는 비릿한 향이 공기 중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전자제품, 타이어, 천, 금속 등 이색적인 재료로 제작된 작품들 또한 특유의 냄새를 풍기는 것 같다. 눈으로 보고 있지만 어쩐지 향기가 연상되는 것은 우리의 감각이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다양한 감각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대표적으로 ‘오감’이라 불리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각체계로 여겨진다. 이 오감 중에서도 특히 시각에 집중해 왔던 것이 시각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시각이라는 한 가지 감각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감각은 소외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최근의 미술은 보고, 듣고, 만지며 심지어 냄새를 맡거나 음식을 먹는 다양한 경험까지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후각 경험은 어쩌면 시각이나 청각 등 다른 감각보다 가장 먼저 작동하며 본능적으로 보이지 않는 대상까지 인식하게 만드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흘러오는 냄새가 특정 대상을 떠올리게 하거나 혹은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등 후각은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감각을 빠르게 자극한다.

이러한 후각의 특징 때문에 현대미술에서 향은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작품 자체에서 향이 나기도 하고, 작품에 대한 감각적 체험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작가가 향을 작품 설치에 의도적으로 사용해 공간 전체를 작품화하기도 한다. 전시 공간에 설치된 향은 관람객이 전시를 공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며 작품에 대한 정서적 경험을 강조한다. 이처럼 향을 직접 활용하는 작품부터 공간을 공감각적으로 만들거나 보이지 않는 향을 상상하게 만드는 작품까지 현대미술에서 향의 역할은 매우 다양하다.

지난번 비물질 작품을 언급하며 소개한 오인환 작가는 물질과 언어, 정체성의 소멸을 드러내고, 취약하고 사라지는 풍경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향가루를 재료로 사용했다. 불에 타 재만 남긴 채 소멸되는 향가루는 재료 특성으로 인해 전시장 안을 짙은 향냄새로 가득 채운다. 작품 재료로 발생하는 냄새이긴 하지만 타면서 퍼지는 향냄새 또한 작가가 의도한 작품의 한 축이다. 향가루가 타고 사라지며 뿜어내는 짙은 향은 직접적으로 작품 재료를 인식하게 한다.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참여한 구정아 작가는 작품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향을 중요하게 다룬다. 작가는 향을 장식이나 연출 같은 작품의 보조적 수단으로 사용하기보다 전시와 작품의 중심 주체로서 활용한다. 오랫동안 지속해 온 비물질성에 대한 탐구는 보이지 않는 것을 경험하고 기억을 공간에 담아내기 위한 향기 프로젝트로 확장돼 왔다. 작가는 향을 통해 특정한 도시나 장소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며 향을 매개로 감각적 경험과 정서적 기억을 연결한다.

한편 미술관의 굿즈, 아트상품에서도 향을 활용하는 사례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향료를 조합해 새로운 향을 만드는 조향사와 함께 작가와 작품의 향을 상상해 상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은 키키 스미스의 ‘자유 낙하’ 전시를 개최하며 조향사와 함께 개발한 향을 전시실에 설치하고 동시에 룸 스프레이로 제작, 판매했다. 관람객은 향을 통해 전시를 다채롭게 경험함과 동시에 후각적 기억으로 간직하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 또한 2025년 전시와 연계해 19세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작품을 향으로 해석한 아트상품을 제작했다. 이러한 향들은 단순히 상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시의 경험과 기억을 연장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만나본 적 없는 19세기 작가와 작품을 향으로 해석하고, 전시에 어울리는 새로운 향을 만들어내는 조향사는 일종의 ‘향기작가’가 돼 또 다른 전시 경험을 만드는 셈이다.

‘국내 1호 향기작가’로 불리는 한서형 작가는 국립부여박물관,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제주 유동룡미술관 등 다양한 기관과 협업하며 전시에 향기를 연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특히 나무, 돌, 종이와 같은 자연의 재료에 향기를 머금게 하거나 자연에서 채집한 이미지와 감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향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선보인다. 현재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에서는 박노수 화백의 작품에 한서형 작가의 향을 더해 회화와 향이 만나는 새로운 감각적 경험의 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이처럼 직접 향기를 맡으며 전시 혹은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과 달리 한발 더 나아가 시각적 설치를 통해 향을 상상하게 하는 방식의 작품도 있다. 냄새를 통해 보이지 않는 풍경의 이면을 드러내는 후각예술가 김지수 작가는 향을 ‘채집’한다. 작가는 실험실에서 사용할 법한 굵고 긴 면봉과 유리병을 들고 다니며 나무, 돌, 이끼 등 채집 대상이 되는 장소와 사물의 표면을 문질러 향의 흔적을 수집한다. 쉽게 휘발되고 사라지는 비물질인 냄새를 모아 그 흔적을 시각화하는 방식은 후각을 눈앞에 드러내는 독특한 작업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드로잉과 함께 채집된 향기를 벽면에 설치해 마치 향이 공간 전체로 퍼져나가는 듯한 인상을 주며 단순히 직접적인 냄새를 넘어 시각적 상상력뿐만 아니라 후각적 상상력을 동시에 자극한다.

이처럼 향을 사용하는 현대미술은 예술의 경계를 흔들며 눈에 보이는 것만이 작품인지, 감상은 반드시 시각에만 의존해야 하는지, 작품은 반드시 물질이어야만 하는지와 같은 복합적인 질문을 던진다. 향은 작품을 단순히 보거나 이해하는 데서 나아가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는 과정 자체를 예술로 확장한다. 또한 시각예술가와 조향사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향은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열어 보이며, 현대미술이 향을 통해 얼마나 넓고 유연하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필자 김유진은 공공미술에 대한 논문을 썼고, 문화라는 전체적 맥락 안에서 소통하고 공감하는 예술을 연구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