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더위가 시작된다는 소서(小暑)를 지나면 마음이 먼저 바다로 향한다. 올여름 휴가지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면 남쪽 끝의 보물섬을 후보에 올려보자. 경남 남해군이다. 요즘 남해는 인기 있는 여름휴가지로 꼽힌다. 지난해 7월 대형 리조트가 문을 열면서 숙박 예약 플랫폼의 검색량이 국내외 도시를 통틀어 가장 크게 늘었을 정도다. 하지만 남해의 매력은 새 건물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한려수도를 굽어보는 산사와 옛 봉수대부터 갯마을의 물놀이, 촌집을 고쳐 만든 카페까지. 취향대로 골라 담을 즐길거리가 무궁무진하다. 동선 짜기도 어렵지 않다. 섬 남쪽에서 하루, 동쪽에서 하루를 보내는 1박2일이면 넉넉하다. 이번 여름 남해가 차려 놓은 피서 목록을 하나씩 살펴보자.
남해여행의 첫걸음은 금산이다. 해발 705m의 이 산은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한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기암괴석 38경이 늘어선 절경 덕분에 ‘남해금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정상 부근까지 오르는 길도 어렵지 않다. 보리암 입구까지 자차 이동이 가능해서다. 주말이나 공휴일, 성수기 등 인파가 몰릴 때는 상황이 조금 달라진다. 그래도 복곡주차장에서 유료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보리암 입구부터는 완만한 길을 따라 1㎞ 남짓 걸어야 한다.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지만 청량한 공기로 가득한 숲을 걷는다는 점이 매력이다.
남해 금산 보리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보리암은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꼽히는 사찰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 전 이 암자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해수관음상 앞에 서면 쪽빛 바다와 크고 작은 섬들이 발아래로 일렁인다. 이른 아침이라면 운해가 산허리를 감싸는 장관과 마주할 수도 있다. 입장료는 성인 1000원으로 현금이나 계좌이체만 받는다. 군인은 무료다.
여기서 발길을 돌리기에는 아쉽다. 10여 분만 더 오르면 금산 정상이다. 고려시대에 쌓은 것으로 전해지는 봉수대가 그곳에 남아 있다. 높이 4.5m, 둘레 26m 규모로 현존하는 봉수대 중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한다.
이 유적은 동래에서 한양까지 이어지던 통신망의 최남단 출발점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오장 2명과 봉졸 10명이 산정에 머물며 남해안의 동태를 살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왜적의 움직임을 불과 연기로 알리던 옛 군사통신의 현장에서 360도로 트인 한려수도를 눈에 담아 보자.
재두식당 멸치쌈밥.
백년가게에서 멸치쌈밥·촌집카페서 디저트
산에서 내려왔다면 든든한 식사가 먼저다. 금산 자락의 재두식당은 1967년부터 멸치쌈밥을 내온 노포다.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가게’로 뽑힌 데다 방송에 소개되며 전국구란 명성을 얻었지만 음식만큼은 여전히 투박하고 정직하다. 매콤하게 조린 굵은 멸치를 상추에 올리고 밥 한술과 함께 싸 먹으면 젓가락질을 멈추기가 어렵다. 점심에만 문을 열고 재료가 떨어지면 일찍 닫으니 오후 2시 전에 도착해야 마음이 놓인다.
후식은 상주은모래비치 끝자락에서 해결하자. 카페 ‘남해촌집 화소반’은 오래된 가옥을 고쳐 만든 공간이다. 낮은 지붕과 너른 마당, 외벽에 적힌 짧은 문구가 정겨움을 더한다.
드립커피와 꽃차, 귤 모양 화과자 같은 전통 디저트가 대표 메뉴다. 여러 다과를 한 접시에 모은 ‘촌집 플레이트’를 주문하면 골라 먹는 재미까지 챙길 수 있다. 혼자 떠나온 여행이라면 책 한 권을 곁들여도 좋겠다. 마당에 앉아 파도 소리를 배경 삼아 차 한 잔을 비우다 보면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남해 두모마을.
다랑논 아름다운 두모마을 바닷가서 물놀이
본격적인 물놀이를 원한다면 두모마을로 향할 차례다. 금산 남쪽 앵강만을 마주한 이 마을은 계단식 다랑논과 잔잔한 물빛으로 이름난 어촌이다. 지난해에는 전국 1200여 개 농촌체험휴양마을 중 스무 곳뿐인 ‘스타마을’로 뽑히기도 했다. 소나무 그늘에 자리 잡은 캠핑장은 주말마다 예약이 일찌감치 마감될 만큼 인기다.
여름의 두모마을은 해양 액티비티 천국으로 변신한다. 시(Sea)카약을 타고 앵강만을 미끄러지듯 가로지르고, 바나나보트 위에서 짜릿한 비명도 질러 보자. 물이 빠지면 갯벌이 열린다. 고둥과 소라게, 새끼 망둑어까지 모습을 드러내는 물가는 아이들에게 살아 있는 생태교실이다. 모든 프로그램은 날씨와 마을 사정에 따라 유동적으로 운영되니 방문 전 전화 문의(055-862-5865)는 필수다.
쏠비치 남해.
쏠비치 남해, 전 객실에서 한려수도 한눈에
지난해 7월 미조면에 문을 연 쏠비치 남해는 개장 1년 만에 남해여행의 판도를 바꿔 놨다. 이탈리아 남부 휴양지 포지타노에서 모티브를 얻고 다랑논의 단차 지형을 그대로 살린 계단식 건물이 바다를 향해 층층이 내려앉는다. 451실 전 객실에서 한려수도의 다도해가 내다보인다는 점도 자랑거리다.
쏠비치 브랜드 네 지점 가운데 유일하게 5성급 인증을 받은 시설이기도 하다. 리조트 안에서는 유자, 마늘, 멸치 같은 남해 특산물을 활용한 미식이 준비돼 있다. 전복리소토와 유자 음료가 대표적이다. 바다를 마주한 야외 인피니티풀부터 사계절 운영하는 아이스링크까지 즐길거리도 다채롭다. 연인과의 기념일에도, 삼대가 함께하는 가족휴가에도 두루 어울리는 공간이다.
독일마을에서 맛볼 수 있는 당케슈니첼.
독일마을과 원예예술촌에서 ‘이국의 오후’
이튿날 해안도로를 따라 동쪽 삼동면으로 30분 남짓 넘어가면 분위기가 확 바뀐다. 남해독일마을은 1960~1970년대 낯선 땅으로 떠났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귀국 후 정착한 동네다. 새하얀 벽과 주황빛 지붕의 집들이 언덕을 따라 늘어서 이국의 정취를 자아낸다. 마을 입구의 파독전시관은 타국에서 서로 의지하며 버텨 낸 이들의 사연을 품고 있다. 점심이나 이른 저녁으로는 ‘당케슈니첼’을 추천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가정식을 충실히 재현한 식당으로 바삭한 슈니첼에 시원한 음료 한 잔이면 유럽의 어느 골목이 부럽지 않다.
원예예술촌.
바로 옆 원예예술촌도 놓치지 말자. 예술가 20세대가 각자의 개성으로 정원을 가꾸며 사는 마을이다. 담장이 낮아 잘 손질된 뜰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고 정원 사이 산책로는 기념사진 배경으로도 손색없다. 가장 깊숙한 자리의 전망대에 오르면 남해의 농촌이 한눈에 들어온다.
물건리 방조어부림.
물건리 방조어부림, 숲이 품은 해변에서 휴식
독일마을 언덕 아래에는 300년 넘는 세월을 품은 숲이 있다. 물건리 방조어부림이다. 마을 사람들이 바닷바람과 파도를 막으려 손수 가꾼 이 숲은 초승달 모양으로 해안을 감싸안는다. 팽나무, 푸조나무, 느티나무 등 100여 종의 나무가 우거졌고 큰 나무만 헤아려도 2000여 그루에 이르러 한여름에도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이름 그대로 바람을 막는 방조림이자 물고기를 불러들이는 어부림 역할을 겸한 덕분에 예부터 마을의 수호신처럼 극진히 보호받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만큼 보존 가치도 높다.
숲 앞으로는 자그마한 몽돌해변이 활을 쏘듯이 굽이쳐 있다. 짭조름한 바닷내와 풀 향기가 뒤섞인 공기부터 남다르다. 피서철에도 비교적 한적해 조용히 해수욕을 즐기려는 이들에게 제격이다. 파도가 몽돌을 굴리며 내는 자글자글한 소리는 그 자체로 훌륭한 자장가다.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낮잠 한숨 청해 보는 것은 어떨까.
초록스토어 기념품으로 여행 마침표
돌아가는 길에는 지족마을의 ‘초록스토어’에 들러 여행을 기념해 보자. 남해에 터를 잡은 디자이너 부부가 꾸린 소품가게로 초록색 차양이 간판을 대신한다. 남해의 색과 이야기를 담은 엽서, 문구, 방향제 등이 진열대를 채우고 있어 구경만으로도 즐겁다. 가게 앞 지족해협에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명맥을 잇는 전통어구, 죽방렴이 V자로 물살을 가르니 오가는 길에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져 보는 것도 좋겠다.
남해의 여름은 부지런한 여행자에게 후하다. 이른 아침 금산에 올라 더위를 피하고, 한낮에는 바다와 숲 그늘에서 시간을 보내고, 해 질 무렵 이국적인 마을을 거닐면 하루가 꽉 찬다. 성수기에는 숙소와 체험 프로그램의 예약 경쟁이 치열하니 서두르는 편이 좋다. 올여름 휴가계획서의 첫 줄에 남해를 적어 보자. 사진=필자 제공
필자 김정흠은 여행작가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주로 여행 카테고리의 콘텐츠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국내외 여행 매체 등과 함께 다채로운 여행 콘텐츠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