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찬란한 오늘

입력 2026. 07. 07   15:14
업데이트 2026. 07. 07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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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스테이지 - 음악극 ‘눈이 부시게’

노년의 육체와 젊은 영혼의 기막힌 엇박자
빛나는 대사들로 빚어낸 눈부신 판타지

동명 인기 드라마 100분으로 압축

원작 이야기 감동에 음악의 힘 더해
배우 김선경의 완벽한 연기도 한몫

음악극 ‘눈이 부시게’ 공연 모습. 사진=스타도어엔터테인먼트
음악극 ‘눈이 부시게’ 공연 모습. 사진=스타도어엔터테인먼트



나 같은 구형 인간은 낯선 세계와 맞닥뜨리면 일단 활자부터 찾고 보는 습성이 있다.

2009년 무렵 뮤지컬을 처음 담당하게 됐고, 늘 그랬듯이 서점으로 달려가 두툼한 뮤지컬 입문서 한 권을 집어 왔다. 주요 작품과 스타 배우들의 이름이 빼곡한 그 책에서 여배우 챕터 두 번째 인물로 소개된 이가 김선경이었다(첫 번째는 강효성이었다).

뮤지컬의 ‘뮤’도 모르던 당시에도 김선경은 TV를 통해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 이 사람이 뮤지컬배우였어?’ 했던 게 그에 관한 첫 감상이었다.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배우가 뮤지컬이란 무대에서 노래하고 연기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관극의 인연은 좀처럼 닿지 않았다. 2010년을 끝으로 그는 한동안 무대를 떠나 있었고, 이후 다시 돌아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지만 희한하게도 일정이 맞지 않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꾸역꾸역 흘렀고, 김선경의 출연작을 보기 위해 장장 17년을 돌아와야 했다.

음악극 ‘눈이 부시게’ 객석에 앉았을 때 마음이 벅차올랐다.

‘눈이 부시게’는 수많은 시청자의 인생작으로 꼽히는 동명 드라마를 100분 남짓한 시간으로 압축해 무대에 올린 창작 초연 음악극이다. 방대한 이야기를 제한된 무대 위로 끌고 온 만큼 속도감이 KTX급이다.

아나운서 지망생인 스물다섯 혜자(강세정 분)는 우연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시계를 손에 넣는다. 시계를 돌리면 과거로 갈 수 있지만, 그만큼 자신은 나이를 먹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준하(윤서빈 분)와 풋풋한 감정을 쌓아 가던 중 택시기사인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혜자는 망설임 없이 시계태엽을 마구 감아 버린다.

다음 날 눈을 뜬 혜자(김선경)는 70대 노인으로 변해 있다.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허리는 굽었지만, 영혼만큼은 여전히 스포티한 스물다섯이다. 70대의 육체와 20대의 영혼이 빚어내는 이 기막힌 엇박자가 쉴 새 없이 웃음을 펌프질한다.

드라마를 보신 분이 많으니 이 작품의 기막힌 반전을 공개해도 될 듯하다. 시간 이탈도, 마법의 시계도 모두 혜자의 머릿속 환영이었다. 70대 혜자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 극 전반부의 모든 이야기는 현재의 자신을 가장 찬란했던 스물다섯 청춘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70대 노인 혜자의 왜곡된 기억이었던 것이다. 이 진실이 드러나면서 객석 곳곳에선 밭은 기침과 훌쩍이는 소리가 동시다발로 터져 나왔다.

1970년대 엄혹했던 시절, 신문기자였던 남편 준하를 잃고 홀로 남겨진 혜자는 교통사고로 걷지 못하게 된 아들 대상(성노진 분)을 모질고 강하게 키웠다. 스스로 독한 엄마가 되기를 자처하며 한평생을 버텨 온 것이다.

혜자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마법의 시계는 악한 경찰관이 남편에게 빼앗아 찬 유품이었다. 남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억울함이 ‘시간을 돌려 그를 살리고 싶다’는 강렬한 판타지로 둔갑한 것이다.

한겨울 혜자가 손에 쥐고 마당을 쓸던 빗자루에도 사연이 묻어 있다. 다리가 불편한 아들이 혹여 눈길에 미끄러질까 매일 새벽 남몰래 눈을 치우던 엄마의 모성이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와중에도 눈만 오면 반사적으로 빗자루를 들고 나가는 혜자의 굽은 등은 관객의 가슴을 후벼 판다.

극 후반부, 노인이 된 혜자는 돋보기안경을 쓴다. 혜자는 안경을 쓰며 자신이 노인이 됐다는 서글픈 현실을 자각한다. 하지만 극 후반부 반전이 밝혀진 뒤 이 안경은 혜자가 알츠하이머병이라는 가혹한 현실에서도 가족들의 얼굴과 과거의 소중한 기억을 똑바로 바라보려는 의지를 상징하게 된다.

음악극이란 장르를 택한 것도 뛰어난 한 수다. 노래들은 혜자의 조각난 기억 사이사이를 메우며 감정을 확대한다. 노래의 효과적인 삽입 덕에 극은 실컷 달리고 난 뒤의 심장박동처럼 빠르게, 때로는 오래된 괘종시계의 초침처럼 느릿하게 흘러간다. 조명 연출도 좋다. 따뜻한 노란빛과 차갑고 날 선 푸른빛이 교차하며 혜자의 온전치 못한 정신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해 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역시 배우들의 힘이다. 나에겐 ‘신비로운 배우’ 김선경의 노래와 연기를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자꾸만 눈이 가늘어진다. 혜자가 무대에서 시계의 바늘을 돌릴 때마다 객석에 앉은 나의 시간도 함께 거꾸로 흘러간다.

원작에 기반한 명대사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대부분은 혜자의 대사다. 혜자의 먹먹한 독백이 담긴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라든지 평범하고 대단한 것 없는 매일의 일상이 얼마나 경이로운 축복인지 일깨워 주는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큼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와 같은 대사가 오래 남는다.

역시 가장 파워풀한 대사는 이 작품의 핵심 메시지이자 극의 피날레에 울려 퍼지는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일 것이다.

2009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마 김선경의 작품을 만사 제쳐 놓고 보러 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눈에 담고 마음의 뚜껑을 덮어 오래오래 기억할 것을 다짐했을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라”는 마지막 대사가 객석에 떨어졌다. 무대 위에서 김선경은 찬란했고, 눈이 시릴 만큼 근사했다.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마음이 닿는 구석마다 그가 남긴 빛이 일렁였다. 눈이 부시게, 마음이 부시도록. 사진=스타도어엔터테인먼트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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