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 대 친공…이념 전쟁의 최전선이었던 섬

입력 2026. 07. 02   16:03
업데이트 2026. 07. 02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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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책 』 경남 거제포로수용소

지난달 찾은 경남 거제포로수용소는 공원이 돼 있었다. 축소된 채 모형만 남아 있어 이곳이 6·25전쟁 당시 또 하나의 전선이었음을 더 이상 실감하기 어렵다고 구보는 느낀다.

1950년 9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적의 퇴로가 차단돼 포로가 생겨났다. 같은 해 10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수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유엔군사령부는 내륙에서 포로를 관리하는 게 안보상 위험하다고 판단해 부산에 세웠던 포로수용소를 섬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12월부터 평탄하고 넓은 내륙 분지였던 거제도의 고현동·수양동 일대 12㎢에 수용소 건설이 시작됐다(『한국전쟁사』).

‘유엔군 제1포로수용소(United Nations POW Camp No. 1)’였고, 준장급 장성이 소장을 맡았다. 가로·세로 200m의 구획으로 쪼개 60·70·80·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구역(enclosure)으로 나누고 구역마다 영관급 지휘관을 뒀다. 이듬해 2월부터 단위 구역마다 포로 6000명씩을 배당했다. 당초 3만8400명 수용에 맞춰 설계했으나 모두 17만3000여 명에 달했다. 현재 서울 종로구 주민 수 13만6000여 명보다 많았다. 북한군 15만 명, 중공군 2만 명, 의용군 3000명이었다.

피란민들도 수용소 바깥에 진을 쳤다. 인원이 늘어나면서 양철집, 루핑, ‘하꼬방’ 등을 지어 거주했다. 12월 23일 아군의 흥남 철수 때 구조선 메리디스 빅토리호에 필사적으로 올라탔던 피란민 1만4000명도 합세했다. 피란민 수가 10만 명에 달하면서 고현동 일대에는 모두 27만여 명이 거주하게 됐다.

포로수용소 부지였던 경남 거제시 고현동 일대를 계룡산 정상에서 촬영한 모습.
포로수용소 부지였던 경남 거제시 고현동 일대를 계룡산 정상에서 촬영한 모습.

 

포로들에게는 제네바협약에 따라 음식, 의복, 의료서비스가 제공됐다. 자치가 허용돼 취사, 빨래, 청소 등은 직접 했다. 운동장에서는 씨름, 합창 등의 행사도 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피란민들과의 교류도 생겨났다. 수용소 측이 금했지만 포로들의 위생용품이나 ‘C레이션(전투식량)’, 피복, 담배 등과 피란민들의 술, 된장, 김치, 채소, 전황정보가 물물교환됐다. “상추가 생기면 포로들이 여러 장을 둥글게 펼쳐 밥을 얹어 쌈으로 먹곤 했다”고 당시 이 마을 중학생이던 고복개(1937~ ) 여사가 목격담을 들려준다.

수용소 내 실상은 공식 보고와 달리 매우 혼란스러웠다. 인공기가 휘날리고 포로들이 무장한 채 군가를 부르며 훈련을 했다. 고 여사는 “포로들이 ‘위대한 스탈린 동지’를 부르며 운동장을 돌곤 했다”고 회상한다. 수용소는 방관했다. 포로들이 몰래 사제 무기까지 대량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감시가 허술했다. 지휘계통이 일정하지 않아 불안정했고, 소장도 자주 교체되곤 했다.

6·25전쟁 당시 거제포로수용소 모습(왼쪽)과 포로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제공
6·25전쟁 당시 거제포로수용소 모습(왼쪽)과 포로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제공

 

이런 상황이다 보니 폭동과 갈등이 공공연하게 불거지기 시작했다. 자유송환 원칙에 따른 ‘송환 심사’가 기폭제가 됐다.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친공포로와 북한으로의 귀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 간의 갈등이 이념 전쟁의 축소판처럼 펼쳐졌고, 막사 안에서 살생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포로수용소가 또 하나의 전장이 됐다. 포로들은 수용소 안에서도 조직을 유지했다. 인민군 장교들이 지휘체계를 그대로 가동하며 포로들을 통제했다. 외부와 통신하며 항의시위와 폭동을 기획했다. 반공포로들을 색출해 공개적으로 린치를 가했다.

1952년 2월 미군이 친공·반공포로를 분리 수용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거세게 저항한 친공포로 구역에서 포로 76명이 사망했다. 경비병 1명도 목숨을 잃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포로』).

1952년 5월 7일 공산군 포로 76구역에서 수용소장 프랜시스 도드 준장이 포로 대표와 면담하다가 인질로 잡히면서 이념전 실상이 외부에 알려졌다. 북한이 노동당 부위원장인 박상현을 포로수용소에 위장 침투시켜 일사불란한 지휘계통을 만든 뒤 북한군 포로 최고 선임자 이학구 대좌에게 도발을 사주한 사건이었다. 포로들은 각 막사 간에 전화시설을 갖추고 포로조직을 인정하라는 등 7개 항을 요구했다.

여기에 더해 처우 개선,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 철회, 포로 심사 중지 등을 제시했다. ‘고문과 학살, 세균전 실험 대상을 중지’하라는 억지 주장도 폈다. 미 8군은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을 받아 찰스 콜슨 준장을 급파했다. 콜슨은 포로들의 요구를 상당 부분 들어주는 각서에 서명하고 5월 10일 도드를 되찾았다. 미군은 판문점 정전협상을 불리하게 만든 책임을 물어 두 장군을 모두 대령으로 강등했다(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구보는 전장의 군인이 아닌 수용소 포로들이 미군 장성 2명의 계급을 날리고 협상을 뒤튼 사실에서 인도주의가 역이용당했음을 확인한다.

6·25전쟁 당시 거제포로수용소 모습(왼쪽)과 포로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제공
6·25전쟁 당시 거제포로수용소 모습(왼쪽)과 포로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제공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따라 남북 포로들은 ‘자유의사 송환’ 원칙에 따라 행선지를 선택했다. 이에 따라 8월 5일부터 9월 6일까지 판문점 인근 중립지대에서 유엔군 측은 1만2773명(국군 8231명, 미군 3597명, 영국군 945명)을 돌려받았고, 공산 측에는 북한군 7만183명과 중공군 5640명 등 7만5823명을 넘겼다.

북도 남도 원하지 않는 포로들도 있었다. 인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스웨덴·스위스로 구성된 중립국 송환위원회가 그들을 인수해 인도로 이송했다. 그 수가 북한군 포로 325명, 중공군 포로 1만4715명이었다(국제적십자위원회). 구보는 중공군 포로의 4분의 3이 대만행을 택한 데 주목한다.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국공내전 때 국민당군 소속이었다가 인민해방군에 패해 흡수당한 뒤 6·25전쟁에 투입돼 아군의 포로가 됐다. 전투보다는 공산당 체제에서 탈출할 기회를 노렸던 사람들이었다. 북한군 포로들도 일부는 인도에 정착했고, 나머지는 중립국이나 제3국으로 흩어졌다.

정전 후 거제포로수용소는 폐쇄돼 빠르게 변화를 맞았다. 철조망이 걷히고 피란민들이 막사 자리에 집을 지었다. 지금은 수용소 막사와 미군 PX, 경비대 본부, 탄약창, 초소 모형, 밀랍인형, 흑백사진 등이 당시를 전하고 있다. 뒤편 580m 높이의 계룡산 정상에는 수용소의 일상을 유엔군사령부에 보고하던 통신부대의 잔해가 그대로 남아 있다. 구보는 산 아래 수용소를 내려다보며 그 자리에 17만 명이 수용됐었고 그곳에서 이념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이념에 넌더리를 치며 남도 북도 아닌 제3국으로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안내표지판 어딘가에 좀 더 선명하게 표시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진=필자 제공

수용소 막사와 탄약창고.
수용소 막사와 탄약창고.

 

포로수용소는 현재 유적공원으로 바뀌었다.
포로수용소는 현재 유적공원으로 바뀌었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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