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개성상인 자신감 고스란히…

입력 2026. 07. 02   15:18
업데이트 2026. 07. 0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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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곁에, 예술』
  옛 그림 속 숨은 이야기- 20. ‘기로세련계도’ 김홍도가 그린 개성 유지의 모임

울긋불긋 단풍의 계절이다. 험준한 산 아래 소나무가 듬성듬성 있는 건물 터에 흰색의 큰 차일이 펼쳐졌다. 도포에 갓을 쓴 사람들이 네모난 자리에 빙 둘러앉아 있다. 다들 복장을 갖춘 채 앞에는 음식상을 하나씩 받아 놨다. 참석자 중에는 흰색 수염을 가진 사람들이 제법 많아 연세가 지긋한 분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왼편엔 상중에 쓰는 흰 갓을 쓴 사람도 보여 빠질 수 없이 중요한 모임에 참석했음을 알려 준다.

자리 주변에는 병풍을 휘둘렀고, 한가운데 놓인 큰 상엔 꽃을 담은 병과 술병이 있다. 시종 하나와 동자가 술을 따르고 댕기 동자들이 술잔을 공손히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있다. 연회에선 악공들의 연주와 무동의 춤도 빠지지 않는다.

자리 바깥쪽은 더 시끌벅적하다. 기단 계단 쪽에는 모임에 지각한 지팡이를 짚은 노인을 시동이 부축하고 자리로 안내한다. 그 뒤로는 만취해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사람을 시동이 부축한다. 상을 이고 지는 아낙네들, 말과 나귀를 끄는 시종,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탁자를 놓고 올라선 사람들의 면면도 보인다. 그림 왼편 병풍 바깥에는 노인들과 함께 온 시종 또는 가족이 주의 깊게 각자의 ‘어르신’을 살피고 있다. 더러 어떤 이는 악공 연주에 본인들이 신이 났는지 어깨를 덩실거리며 소매춤을 추기도 한다. 소나무 아래에는 아예 주모가 나와 술을 돌리고 있다. 그 옆으로 멀리서 짐을 싣고 온 소들도 대기 중이다.

1804년 9월 개성의 송악산 아래 고려 궁궐 터 만월대(滿月臺)에서 개성 노인들이 떠들썩한 모임을 가졌다. 모임 이름은 작품의 왼편 전서(篆書)로 ‘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契圖)’라고 예스럽게 쓰였다. 기로는 60세 이상의 노인을, 세련은 승계했다는 뜻이다. 계는 모임이다. 그림에는 64명의 노인과 200여 명이 넘는 시종과 구경꾼이 묘사돼 있다.

김홍도의 ‘기로세련계도’(1805, 비단에 담채, 137.3×53.2㎝, 개인 소장).
김홍도의 ‘기로세련계도’(1805, 비단에 담채, 137.3×53.2㎝, 개인 소장).


작품 위에는 이 그림을 어떻게 그렸는지 긴 글이 적혀 있다. 이를 발문(跋文)이라고 하는데, 당대 활동했던 문신 홍의영(洪儀泳·1750~1815)이 적었다. 발문에 따르면 이 모임은 1607년에 열렸던 개성 원로들의 모임을 다시 이어 간다는 의미다. 거의 200년 만에 개성 만월대에서 뜻깊은 모임을 하게 된 것을 기념해 글씨의 주인공은 당대 서예가로 이름 높은 유한지(兪漢芝·1760~?)에게 보내 그림의 제목을 작성했다. 그 옆에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년경)의 관서(款書)와 인장이 있다. 내용을 알지 못하고 그림만 봐도 왜 그리 흥겨웠는지 이해할 수 있다. 

김홍도의 만년기 그림으로 순조대 궁중화원으로 다시 들어가 활동했던 시기의 작품이다. 김홍도 특유의 하엽준으로 그린 원숙한 필치의 산수화를 볼 수 있고, 핵심이 되는 주요 장면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도로 잘 짰다. 또한 그날 있을 법한 사람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그렸다. 당대의 사람들이 왜 그렇게 김홍도의 작품을 갖고 싶어 했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 마치 그림을 보면 김홍도가 당일 개성 만월대 계회에 참석, 일일이 스케치를 하며 그린 작품인 듯하지만 사실 행사 이후 설명문을 보면서 상상해 그린 것이다.

계회가 끝난 이후 행사 주최자가 이 모임에 관해 간략히 적은 내용을 보내 문장을 쓰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작품의 제목 글씨를 써 주는 사람을 각각 섭외한 것이다. 다들 문장과 글씨, 그림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들인데 이 모임의 주최자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당대 최고의 사람들만 초빙해 계회를 기록으로 남겼을까?

이 모임을 주도한 자는 장후은(張後殷)이고, 계회의 대략적 요지를 적은 사람은 장윤의(張允誼)다. 개성에 거주하는 결성(結城)을 본관으로 두고 있는 장씨 가문이 주도했다. 작품 하단에는 이 계회에 참석했던 64명의 이름과 본관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데, 모두 개성에 거주하는 이들이다. 이름과 본관을 봤을 때 당대 명문가로 보긴 어렵고, 개성의 유지들로 보인다. 모임 규모와 다시 이를 기록하는 모습에서 당시 양반들이 남겼던 계회도의 양식을 갖추면서도 무언가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는 모습을 지울 수 없다.

‘기로세련계도’ 속 행사 부분.
‘기로세련계도’ 속 행사 부분.


장후은은 1809년 순조의 『일성록』에 이름이 나온다. 개성의 경덕궁 비각을 다시 지을 때 비용과 장인을 직접 모아 공사 감독까지 해 순조가 상을 내린 인물 중 하나다. 개성의 유지로 재력과 조직력을 갖춘 인물로 볼 수 있다.

이들이 살았던 개성부는 유수부(留守府)로 불리며 조선시대 한양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베이징(北京)에서 오는 사행로를 따라 중국의 사신이 머물고 접대하는 공간이었다. 국방과 외교비용을 자체적으로 확보하는 특수한 행정구역이었지만, 개성은 풍요롭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고려의 왕도였지만 조선이 들어오면서 100여 년간 개성에선 과거시험이 없었다. 여러 이유로 역사·지리적 맥락에서 상업이 발달하는 조건이 만들어졌고 조선 후기엔 인구 절반 이상이 상업에 종사하는 조선의 상업 특별도시가 됐다. 다른 지역의 군인들은 매년 봄·가을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했으나 개성의 군인들은 봄 한 차례 또는 5~6년에 한 번 할 정도의 특혜를 받았다고 한다.

개성상인들은 전국을 무대로 소나 말을 소유하고 여러 명이 행상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주요 지역에 지점 형태의 송방(松房)을 설치해 전문 경영자인 차인을 상주시키고, 그 지역의 상품 유통을 담당하게 했다. 개성 내에서도 일종의 동업조합인 시전(市廛)을 운영하는 계(契)가 있었고, 일정한 규칙 아래 운영했다. 이들의 상업 활동은 복식부기인 ‘사개치부법(四介治簿法)’, 시장의 시세 이율을 적용하는 ‘시변제(時邊制)’, 환과 어음 발행 등 근대적 요소가 많았다.

18세기 개성상인들은 인삼밭인 삼포(蔘圃)를 경영하고 인삼, 포(布), 종이류, 가죽류 등을 주로 유통했다. 인삼을 홍삼으로 가공해 수출도 했다. 18세기 전반까지 일본이 중국과 외교적으로 직접 교역하지 않으면서 이들의 중개무역을 개성상인이 주도했다. 조선의 인삼과 면포를 수출해 그 결제가로 은을 수입하고 이를 기초로 중국의 비단과 원사, 서책 등 사치품을 수입해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 이러한 재력을 등에 업고 권문세족의 독점권에 대한 이해도 얻을 수 있어 개성상인의 지위가 한층 공고해졌다.

이 그림은 개성상인들의 결속력과 이들이 당대 한양의 권문세족처럼 김홍도·유한지 같은 왕실 화가·서예가를 불러 모임을 그리게 하는 자신감을 보여 준다. 아무 말 없는 그림이지만, 19세기 초반 개성상인의 드높은 자부심이 서려 있는 작품이다. 개성상인 덕분에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의 진수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 ‘기로세련계도’는 ‘단원 김홍도, 시대를 그리다(국립중앙박물관·5월 4일~8월 2일)’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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