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인문학 - 두 도시 이야기
스페인 세비야와 튀르키예 이즈미르<下>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이자
실크로드의 서쪽 종착점
이방인 환대한 흔적 도시 곳곳에
세비야서 추방당한 유대인도
종교·법률체계 보장받으며 정착
다양한 종교 공존하던 도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큰 변화
그리스·튀르키예 주민
종교에 따라 강제 교환 아픈 역사
튀르키예 제3의 도시이자 에게해 최대의 항구도시인 이즈미르는 누군가에게는 ‘스미르나’로, 또 누군가에게는 ‘이즈미르’로 불렸다. 어떤 이름이든 이 도시는 언제나 이방인을 환대하며 종교의 경계마저 허물어뜨렸다. 수천 년 동안 터전을 지켜 온 이들과 새로이 정착하려는 사람이 뒤섞여 튀르키예에서 가장 관대한 도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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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이주가 빚은 도시
이스탄불에서 이즈미르까지는 차로 5시간이 걸렸다. 복잡한 이스탄불 도심을 빠져나오자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가 심어진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즈미르에 도착할 즈음엔 에게해의 푸른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에게해는 그리스신화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바다이며, 이즈미르는 그 신화의 주요 무대다. 우리가 그런 장소에 도착한 게 믿기지 않았다.
여행의 시작은 코낙 광장이었다. 광장 한가운데 우뚝 선 코낙 시계탑은 높이 25m의 석조탑으로 이 안에 오스만, 무어, 독일, 에페수스 고대 그리스의 흔적이 뒤섞여 있다. 탑은 오스만제국 술탄의 즉위를 기념해 세워졌다. 시계장치는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2세가 독일에서 보내온 선물이다. 탑 축조에 쓰인 초록과 빨강의 모자이크 타일은 인근 에페수스 유적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즈미르의 대표 건축물부터 이런 다양한 정체성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상업적 위치 때문이다.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인도 향신료, 중앙아시아의 모피와 금속이 낙타에 실려 아나톨리아 고원을 거쳐 실크로드의 서쪽 종착점 이즈미르로 모여들었다. 여기서 물건을 배에 실어 피렌체, 베네치아 등 지중해 도시로 옮겨졌다.
코낙 시계탑에서 멀지 않은 케메랄트 바자르는 실크로드 무역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다. 시장을 이르는 ‘바자르’에선 세상의 모든 물건을 팔고 있었다. 그중 실크로드의 흔적이 남은 건물, 크즐라아스 한이 눈에 띄었다. 낙타에 짐을 싣고 온 상인들이 물건을 사고팔던 공간이자 실크로드 상인들의 숙소다. 이 건물 마당과 바자르 곳곳에서 동방의 비단과 서방의 은화를 교환하기 위해 다양한 언어가 뒤섞였다.
스페인 세비야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바자르 안쪽 시나고그(유대교 회당) 골목에는 이즈미르 유대인 공동체의 심장부가 자리하고 있다. 세비야에서 쫓겨 온 세파르디 유대인이 새 삶을 뿌리내린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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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 가져온 빵
스페인 남부에서 추방당한 세파르디 유대인은 오스만제국으로 향했다. 기독교 왕은 그들을 추방시켰지만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유대인을 환대했다. 지중해를 건넌 유대인은 이스탄불, 테살로니키 등 오스만제국의 주요 도시에 정착했고 에게해를 면한 고대 항구도시 이즈미르에 짐을 풀었다. 그들의 자본과 상업 네트워크는 이즈미르가 동방과 서방 물자가 교환되던 ‘레반트 무역’의 중심지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오스만제국은 유대인에게 종교의 자유와 독자적인 법률·교육체계를 허용했다. 유대인은 이즈미르 안에 자신들만의 구역을 형성하고 학교와 유대교 회당, 병원을 세웠다.
세파르디 유대인이 이즈미르에 가져온 것은 종교와 상업 네트워크만이 아니었다. 이즈미르 골목을 걷다 보면 이른 아침 골목을 채우는 구수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즈미르 사람들이 500년 넘게 먹어 온 빵 보요즈가 그 주인공이다.
보요즈의 이름은 스페인어로 ‘작은 빵’이나 ‘둥근 빵 반죽’을 뜻하는 ‘보요(bollo)’의 복수형 ‘보요즈(bollos)’에서 유래했다. 세파르디 유대인이 가져온 빵에 묻어 있는 이베리아반도의 흔적이다. 스페인을 떠나며 빵의 이름과 정체성은 가져왔지만 아나톨리아 현지에 맞게 재료를 바꿔야 했다. 이 담백한 빵은 밀가루, 참깨 기름, 소금, 물로 만든 얇은 반죽을 켜켜이 접어 말아 내 만든다.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이 가져온 빵은 이즈미르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아침식사가 됐다. 이즈미르 어디서나 신선한 보요즈와 삶은 달걀 하나, 튀르키예 차이 한 잔을 아침 식탁에서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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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을 견딘 광장
바자르에서 보요즈로 배를 채우고 걷다 보면 고대 도시 스미르나 아고라가 등장한다. 이곳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폴리스의 중심지다.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첫 돌을 놓았다. 기원후 178년 지진 이후 재건된 이 유적은 놀라울 만큼 잘 보존된 지하창고와 수조시스템으로 유명하다. 오스만 시대에 공동묘지로 사용됐는데, 죽은 이들의 땅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으니 고대 유물 약탈꾼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성경을 읽은 사람이라면 유적 위에 쓰인 ‘스미르나’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신약성서 요한계시록 소아시아(현재 튀르키예 서부)에 위치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 하나다. 편지에서 스미르나 공동체는 박해를 견디며 신앙을 지키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즈미르 주변에는 스미르나 아고라 유적뿐 아니라 고대 이오니아 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가장 유명한 곳은 이즈미르 남쪽으로 약 80㎞ 떨어진 에페수스다. 이오니아인이 기원전 10세기에 세운 에페수스는 알렉산더 대왕 시대를 거쳐 로마제국 시대엔 아시아 속주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다. 산 경사면을 따라 깎아 만든 대극장은 최대 2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높이 30m, 3층 무대 건물을 갖춘 규모다. 당시 대극장은 도시 인구의 4분의 1을 수용할 수 있도록 지어졌으니 에페수스 인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시 외곽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도 있다. 파르테논 신전의 거의 2배 규모로 전면이 대리석으로만 지어진 최초의 그리스 신전이다. 에게해 주변 사람들은 ‘더 많은 부’를 얻고자 다산과 부의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기도하러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지금은 대부분 파괴되고 기둥 하나만 남아 있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당시 위상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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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튀르키예 인구 대교환
에게해 건너편 그리스는 튀르키예와 ‘에게해의 앙숙’으로 불릴 정도로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 왔다. 에페수스 부근 ‘시린제’라는 마을의 역사가 이를 대표한다. 시린제는 석류와 체리 등 과일로 만든 와인 산지로 유명한 마을이다. 작고 아름다운 그리스식 석조가옥들이 모여 있다. 원래 이름은 ‘못생긴 곳’이라는 의미의 ‘치르킨제’로 과거 그리스정교회 신자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마을 이름과 살던 사람들이 바뀐 사연은 이렇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튀르키예는 연합국이 분할 통치했고, 에게해 지역은 그리스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스와 앙숙관계였던 튀르키예 입장에서 외세가 자신들의 땅을 좌지우지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민족주의가 불타오르던 시대였다. 당시 무스타파 케말(튀르키예의 초대 대통령)이 이끄는 튀르키예 국민군이 외세인 그리스군을 격파하고 이즈미르를 탈환했다. 이후 스위스 로잔에서 통치에 관한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때 튀르키예의 땅인 아나톨리아 지역은 돌려받지만 에게해 연안의 섬이 그리스 손에 넘어갔다. 이 역사는 오늘날까지 튀르키예와 그리스 간 영토분쟁의 씨앗으로 남아 두 나라는 영해 경계와 섬의 군사화 문제를 놓고 외교적 마찰을 반복하고 있다.
영토분쟁 외에 남은 상흔이 또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 국제법적으로 비준된 강제 인구 이동,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협약’이다. 그리스와 튀르키예 간 인구 교환 기준은 단 하나 ‘종교’였다. 언어나 문화적 정체성이 아니라 그리스정교를 믿으면 튀르키예를 떠나 그리스로 가야 했고, 이슬람을 믿으면 그리스를 떠나 튀르키예로 이주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년 전 이오니아 시대부터 살아오던 터전에서 한순간에 쫓겨나 그리스정교회 신자 약 120만 명이 튀르키예를 떠나 그리스로 갔다. 그리스의 무슬림 35만~40만 명도 선조의 땅을 버리고 튀르키예로 이주해야 했다. 그렇게 그리스정교도 마을 ‘치르킨제’는 튀르키예 무슬림으로 채워졌고, 마을 이름도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의 ‘시린제’로 바뀌게 됐다.
이즈미르는 튀르키예 내에서 독특한 별명으로 불리는데, 바로 ‘이교도 이즈미르’다. 도시가 지나온 역사의 흔적 속에서 세속적이고 개방적인 문화 정체성을 얻은 이 별명을 이즈미르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때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비무슬림이 차지했던 이즈미르는 이제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무슬림인 도시가 됐다. 그러나 이즈미르는 그 역사적 기억을 쉽게 지우지 못했다. 실제로 이즈미르는 튀르키예 안에서 세속주의 성향이 가장 강한 도시로 남아 있다. 유대인 공동체, 이슬람 모스크, 그리스정교회, 로마 가톨릭 성당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독특한 풍경이야말로 ‘이교도 이즈미르’의 맨얼굴이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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