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Ⅲ 』아프리카-우간다 ④
1976년 7월 3일 밤 11시 이스라엘군 수송기 4대가 본토에서 4000㎞를 날아가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은밀하게 착륙했다. 항공기에서 튀어나온 100여 명의 특공대는 우간다군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인질 106명 중 102명을 무사히 구출했다. 세계사에 기록된 이 사건이 바로 ‘엔테베 특공작전’이다. 안이한 경계태세를 갖춘 우간다군은 급습한 이스라엘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옛 엔테베 공항 정문에서 150m 떨어진 지점엔 이 작전을 기념하는 상징비석이 있다. 치열한 격전현장인 관제탑과 여객터미널은 현재 역사유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우간다의 답답한 행정 체계
‘엔테베 격전지 현장 투어’를 신청한 지 수 일이 지났지만 여행사는 “내일은 틀림없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실제 여행은 이뤄지지도 못하는데 여행 창구는 ‘다크 투어(Dark Tour)’ 홍보를 계속했다. “외국인을 끌어들일 수 있는 좋은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낙후된 행정체계가 뒷감당을 하지 못한다.” 관광 해설사 샤론의 이야기다. 그는 “우간다에서는 절대로 ‘노(No)’라고 말하지 않고 ‘내일은 틀림없이(Maybe tomorrow)’를 흔히 사용한다. 출입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여러 명의 도장이 필요한데 그중 한 명이라도 자리에 없으면 업무추진이 불가능하다”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샤론과 함께 옛 공항 정문으로 향했다. AK소총으로 무장한 2명의 초병이 막아섰다. 모병제로 충원된 우간다군 병사들은 체격이 좋다. 직업군인은 힘들지만 청년들에게 인기가 좋단다. 정문에서도 보이는 관제탑은 50년 전의 건물 그대로였다. 촘촘히 박힌 피탄 흔적이 치열했던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초병에게 사진촬영 가능 여부를 물으니 단호하게 거부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니 샤론이 멀리서나마 공항청사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언덕으로 안내했다.
|
인질 협상과 담대한 구출작전
1976년 6월 27일 260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탑승한 에어프랑스 항공기가 텔아비브에서 파리로 가던 중 4명의 테러범에게 납치됐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소속이었다. 여객기는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최종 착륙했다. 독재자 이디 아민은 테러범을 적극 지원했다. 이들의 요구 조건은 세계 각국에 수감된 동료 53명의 석방이었다. 테러범들은 최종적으로 94명의 유대인과 12명의 승무원만 여객터미널에 남기고 나머지는 석방했다.
이스라엘은 협상과 동시에 군사작전을 즉각 검토했다. 엔테베 공항 설계도를 분석했고, 아민 대통령을 사칭하는 대담한 위장 전술도 구상했다. 7월 3일 오후 1시30분 본토에서 이륙한 이스라엘군은 7시간 비행 끝에 심야에 엔테베 공항에 조용히 내렸다. 동원된 전력은 C-130 수송기 4대, 보잉 707 지원기 2대, 특공·지원병력 200명이었다.
치밀한 위장술·과감한 기습으로 제압
엔테베 공항 주변의 호수와 광활한 평원은 수송기가 야간 강습착륙하기에 용이했다. 웅장한 몸통의 C-130 꽁무니 램프가 열리자, 아민 대통령을 상징하는 검은 벤츠 승용차가 가장 먼저 활주로를 밟았다. 뒤이어 수 대의 지프가 뒤를 따랐다. 활주로와 터미널까지는 불과 수백 미터. 대통령 경호행렬로 위장한 특공대가 관제탑 초병 앞에 들이닥쳤다. 갑자기 나타난 대통령 차량을 보고 병사들은 혼비백산했다. 하지만 초병들은 무엇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다시 검색을 시도하는 순간 특공대의 총구는 불을 뿜었다. 관제탑의 우간다군도 응사했다.
그러나 테러범들은 건물 밖 총성에 무관심했다. 그 순간 이스라엘군이 건물 안으로 뛰어들며 확성기로 “엎드려라! 우리는 이스라엘군이다”고 외쳤다. 순식간에 테러범 전원이 사살됐다. 이들이 정예 특공대원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우간다 증원군이 몰려왔다. 이제 수송기에 싣고 온 장갑차의 중기관포가 위력을 발휘했다. 우간다 증원 병력은 관제탑이 이스라엘군에 이미 탈취당한 것으로 오판했다. 양쪽으로부터 집중사격을 당한 관제탑의 우간다군은 결국 전멸당했다. 특공대는 활주로에 있는 미그 17·21 전투기 11대까지 폭파했다.
만약 우간다군 전투기 1~2대가 공중초계 비행만 했더라도 기습작전은 불가능했다. 구출인질 중 부상자와 어린이들을 먼저 수송기에 태웠다. 작전 개시 1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수송기 4대는 다시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이 과정에서 우간다군은 45명이 전사했다. 하지만 이스라엘군 전사자는 요나단 네타냐후 중령 1명뿐이었다. 기습당한 군대는 이처럼 무력했다.
|
참전자들이 전하는 당시 상황
1979년 이디 아민 축출 이후 우간다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점차 회복됐다. 두 나라는 2012년 최초로 옛 터미널에서 공동 추모행사를 열었다. 특히 2016년 40주년 행사 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형이 전사한 작전현장을 직접 찾았다. 특공작전에 참가했던 빌나이의 증언이다. “우리는 실패할 수 없었다. 실패는 인질들의 죽음을 의미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먼 거리가 아니라 인질과 테러범의 식별이었다.”
미셸 바코 기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테러범들은 유대인이 아닌 승객들을 먼저 석방하고 승무원에게도 떠나도록 했다. 하지만 나는 승무원에게 ‘우리는 승객을 버려두고 떠나지 않는 것이 전통이다. 끝까지 함께 남는다’고 말했고 모든 승무원이 동의했다.” 바코 기장의 책임감과 인간애는 아직도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사진=필자 제공
|
해당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