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 』
지평리전투, 중공군을 분쇄시키다
경기 양평군 지평면에 미국과 프랑스의 깃발 아래 전적비와 참전충혼비가 서 있다. 6·25전쟁 판세를 뒤집은 지평리전투가 펼쳐졌던 현장이다. 탱크 한 대가 길옆에 비치돼 있어 75년 전 당시를 상기시킨다. 지평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지만 중앙선이 지나는 요충지다.
1950년 8월 아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을 격퇴한 후 연합군의 인천상륙에 힘입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을 개시했다. 10월 20일 평양에 진입한 데 이어 11월 초에는 압록강까지 올라가 통일을 눈앞에 뒀다. 김일성은 가족을 모두 중국으로 망명시키고 압록강변 강계를 임시수도로 삼았다. 북한이 무너지면 미국과 국경을 마주해야 한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위기감에 중국공산당이 지원군 파병을 결정했다. 펑더화이가 이끄는 18만 명의 중공군이 11월 26일부터 총공세에 나서면서 아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12월 13일 장진호전투에서 퇴각한 유엔군은 12월 말 흥남에서 구조선 편으로 철수했다.
12월 23일 월튼 워커 미 8군사령관이 순직하자 후임으로 도쿄에서 날아온 매튜 리지웨이 사령관은 최전방을 시찰한 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빼앗겼고, 동부전선에서도 38선을 넘어 물밀듯이 남하한 중공군 탓에 퇴각을 거듭했다. 리지웨이는 평택-원주-삼척을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했다. 중공군은 병력을 늘려 40만 명을 투입했다(『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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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11일 중동부에 중공군 6개 연대가 제4차 공세를 가하자 지평리의 미 2사단 23연대전투단은 좌우 인접 부대가 모두 후퇴하면서 고립 상태에 빠졌다. 미 10군단이 연대 철수를 8군 사령부에 요청했지만 리지웨이 사령관은 이를 거부하고 물러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결국 5000여 명의 병력으로 5만여 명의 중공군에 맞서야 했다. 지평양조장에 연합군 전투지휘소를 세운 리지웨이는 병력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종심 방어’ 전략을 지시했다.
방어선을 세로가 아닌 가로로 분산 배치해 아군의 세력권을 연결함으로써 적의 공격을 둔화시키는 전술이었다. 적의 공격을 차례차례 소모시키고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친 후 후방으로 빠져 재편성한 후 다시 전선으로 배치했다. 기동성이 강조되는 작전이었다. 중공군이 ‘손가락 10개를 다치게 하는 것보다 하나를 잘라버리는’ 식의 포위 섬멸전을 펴는 데 따른 대응책이었다.
한반도의 산악 지형은 중공군 전술에 적합했다. 중공군은 지평리에 39군 예하 3개 사단을 투입했다. 연합군은 미 23연대와 프랑스대대를 주축으로 하고 미 37포병대대, 82방공포대대, 503포병대대가 연대전투단을 편성했다. 지평리 사수의 명령을 받은 폴 프리먼 23연대장은 1.6㎞에 걸쳐 횡으로 방어선을 나눴다. 중공군의 포위작전을 막기 위함이었다.
최전방에 1대대를 두고 옆으로 3대대와 2대대, 연대에 배속된 프랑스대대를 배치했다. 2월 13일 밤을 기해 중공군이 대거 포위망을 좁혀왔다. 23연대가 분당 평균 250발의 포탄을 발사해 화력을 발휘했다. 중공군도 300여 발의 포탄을 발사하며 대응했다. 프리먼 연대장은 부상을 입었으나 호송을 거부하고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중국어에 능통했던 프리먼은 중공군 포로를 직접 심문해 중요 정보를 얻어내고 이에 대비했다.
2월 14일 낮 미 공군의 지원 포격이 개시됐다. 로켓과 네이팜탄 폭격이 중공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저녁 무렵 중공군은 총공격을 재개했다. 1개 연대 병력이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나팔을 불어대며 4배의 병력으로 달려드는 중공군에 맞서 프랑스대대는 빨간 두건과 수동식 사이렌 굉음으로 심리적 위축을 가하며 총검전을 펼쳤다. 카투사 한국인 병사 101명도 프랑스 대대를 도왔다. 새벽녘에 중공군은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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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후방에서는 미 1기병사단 5기병연대(연대장 마르셀 G. 크롬베즈 대령)를 주축으로 한 구조대, ‘크롬베즈 특임대’가 편성되고 있었다. 크롬베즈의 5기병연대는 기본 보병 3개 대대에 의무중대, 전투공병중대, 자주포를 장비한 2개 야전포병대대, 2개 중전차 소대와 추가 전차중대를 배속받았다.
2월 15일 아침 도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좌·우측 산지 장악을 지시받은 크롬베즈 연대 1대대와 2대대는 치열한 교전을 펼쳤다. 중공군도 2개 포병대대가 지원에 나섰다. 전투는 오전 내내 계속됐다. 크롬베즈 대령은 기갑병력만이 적의 점령지역을 관통해 지평리에 도착할 수 있다고 판단, 23연대에 배속된 전차 23대를 공격대열에서 분리시켜 지평리로 곧장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크롬베즈 대령은 작전에 앞서 헬리콥터로 진격로를 직접 점검했다. 공격대는 6전차대대 D중대가 선두를 맡고, 70전차대대 A중대가 뒤따랐다. 오후 3시45분 160명의 L중대원이 15대의 전차에 분산 탑승해 공격에 나섰다. 전차 간 간격은 13m를 유지했다. 전방 차량이 포격을 당해 뒤집히는 상황 속에서도 크롬베즈 특임대는 3시간의 격전 끝에 적을 물리치고 연합군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연합군은 52명이 사망하고, 259명이 부상을 입었고, 중공군은 5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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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지평리 동쪽에서 국군 5사단과 8사단을 붕괴시킨 중공군의 4차 공세는 지평리에서 멈춰야 했다(『지평리 전투』). 구보는 지평리전투가 상무정신 위에 전술전략이 얹혀 일궈낸 승리였다는 점에서 지휘관의 작전이 전투의 승패를 가름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다.
지평리전투는 중공군 개입 이후 연합군이 거둔 첫 승리여서 아군의 사기를 한껏 높였다. 중공군은 화력의 열세는 물론 5개 사단에서 동원된 6개 연대를 통합한 지휘체계가 없었다. 또 각 연대가 자체 판단에 따라 중대급 병력을 축차 투입하면서 병력 우세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했다. 지평리전투의 승리로 남한강을 건너 서울 남쪽으로 진출하려던 중공군의 의도는 분쇄되고 아군은 다시 북상할 수 있었다.
구보는 특별히 프랑스군 참전비 앞에서 머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대대를 이끈 랄프 몽클라르의 군인정신에 감동해서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중장이었지만, 한국전에 대대급 부대를 파견하기로 한 정부 결정에 맞춰 계급을 스스로 강등해 참전했다. 르젠 당시 프랑스 국방차관이 “장군이 어떻게 대대장을 맡느냐”고 만류했지만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싸웠다는 긍지를 남기는 데 계급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나의 아버지 몽클라르 장군』). 참군인이었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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