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조명 아래 무대는 숨을 쉰다

입력 2026. 06. 23   15:04
업데이트 2026. 06. 2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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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스테이지』연극 ‘리어의 역’

극단76, 치열하게 쌓은 창작의 50년
경이로운 역사만큼 서슬 퍼런 기념극
날선 언어의 난타전만으로 관객 압도
정통 연극의 맛 보여주는 녹진한 무대


뭐가 됐든 반세기를 버틴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심지어 척박한 연극 동네 얘기라면 그 위업은 두말할 나위 없이 찬란하다. 아니, 찬란해야 마땅하다. 

1976년 닻을 올린 극단76이 50주년을 맞았다. 험난한 빙하기를 견뎌 낸 공룡 화석을 발굴한 것만큼이나 경이롭다. 이들이 결기를 다지며 시퍼렇게 벼려 낸 칼은 연극 ‘리어의 역’이다. 특별기획 ‘극단76 실험과 저항, 그 50년’의 첫 단추를 끼우는 가볍지 않은 무대다.

극단76은 언제나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았다. 사회적 발언과 공동창작을 무기로 삼았던 그 날카로운 이빨을 이번 무대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작정하고 칼을 갈았다. 객석까지 서걱서걱 쇳소리가 들려올 지경이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정통 연극을 관람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만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스마트폰 속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나 대형 뮤지컬 극장에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연극만의 발효된 맛이 있다. 혜화역을 빠져나와 화려한 거리 풍경에 가려진 작은 간판을 찾아내고, 가파른 지하 계단을 내려가 좁은 의자에 옹기종기 모여 앉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의식이다.

정교한 무대장치, 현란한 특수효과는 없다. 오직 텍스트의 무게와 인간의 본질을 파고드는 대사의 힘만으로 공간을 채운다. 물리적 거리가 허물어진 객석에서는 배우의 미세한 눈빛 떨림과 땀방울, 가쁜 숨소리마저 맨눈으로 선명하게 포착된다. 관객은 관찰자에서 벗어나 공간의 공기를 함께 마시는 일원이 된다. 이 압도적인 현장감이야말로 대학로 소극장에서 정통 연극을 마주하는 진정한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치매를 앓는 늙은 배우가 있다. 그는 40년이라는 세월을 셰익스피어 비극 속 군주로 살았다. 눈부신 조명 아래서 그는 언제나 근엄한 왕이었다. 인지기능이 부서져 내리는 지금,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극장 지하방으로 기어들어 갔다. 스스로 선택한 유폐의 삶이다. 무대의 왕관을 내려놓고 숨어든 은밀한 지하에서 노인은 현실의 초라한 자신과 극 속의 위대한 리어왕을 어지럽게 오간다.

늙은 리어는 고립된 방에서 쉴 새 없이 말의 성찬을 쏟아 낸다. 혼자 치는 탁구 랠리 같다. 침묵이 머물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질문해야 내가 생생해져.” “가급적 살아 있어야 해.” 늙은 왕이 무심한 듯이 때론 결기에 차 뱉는 대사들은 화장터의 유골처럼 허공에 뿌려진다.

늙은 리어의 공간에 그의 유일한 벗인 광대가 들어온다. 그는 무대에서 한세월을 왕의 광대로 살았다. 이제 독백은 거친 논쟁으로 탈바꿈한다. 광대는 그의 과거이면서 현실의 조언자다. 리어와 광대는 인생의 동반자처럼 굴다가도 순식간에 맹수처럼 맹렬하게 싸운다. 연기, 배우라는 포장지를 뜯어 버리고 뾰족해진 대사로 상대를 찌른다. 이런 언어의 난타전, 날 선 말의 맛은 오직 연극 무대에서만 맛볼 수 있다.

이제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가진 혈육들의 입장을 들여다보자. 첫째 딸과 둘째 딸의 머릿속에는 늙고 병든 아버지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극장을 팔아 치워 각자 챙길 재산 생각만 가득하다. 오직 돈만을 좇아 움직이는 속물들로 그려진다. 아귀다툼 속에서 배우가 된 셋째만이 고립된 아버지를 이해하고 살핀다.

늙은 리어의 세 딸은 셰익스피어 원작 ‘리어왕’의 세 딸 고네릴, 리건, 코델리아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온갖 감언이설을 퍼부은 끝에 가장 많은 영토를 차지하지만 권력을 잡은 뒤에는 리어왕을 문전박대하며 배신하는 고네릴과 언니 못지않게 잔인하고 교활한 리건. 리어왕이 가장 사랑했던 딸이지만 버림받고, 아버지를 구하려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코델리아.

배우들의 쫄깃한 연기 보는 맛이 일품이다. 백미는 역시 늙은 리어 홍원기의 미친 존재감이다. 억눌렸던 에너지가 최고조에 달하면 그는 달랑 팬티 한 장만 걸친 채 무대 중앙에 선다.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원초적 비극을 앙상한 육신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한 줄기 핀 조명은 노인의 고독을 극대화한다. 낡은 바닥이 삐걱거리는 마찰음과 스산하게 깔리는 첼로 선율이 무대의 긴장감을 높인다. 숨 한 번 쉬는 것까지 철저히 계산된 날것의 연극이다.

‘리어’ 홍원기, ‘광대’ 김왕근 투톱에 현실을 선택한 첫째 딸은 정아미·오화라, 균형을 지키려 하지만 결국 자신을 위해 선택을 하는 둘째 딸은 김소라·전해주, 아버지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보호하려는 셋째 딸은 서혜원·박주아, 그의 남편 ‘사위’는 정이운·전우형이 캐스팅됐다. 홍원기와 김왕근은 2016년 ‘리어의 역’에도 출연했다.

궁지에 몰린 리어는 스스로 목을 매려 한다. 밧줄을 쥐고, 목에 걸고, 긴 대사를 읊조린다. 삶을 마감하는 순간조차 은퇴 무대에 선 배우 같다. 하지만 그는 밧줄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광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곤 환하게 웃는다. “나가자.”

그는 어디로 나가자는 걸까. 딸들의 등쌀에 떠밀려 요양원으로 가는 해석이 보편적이겠으나 그렇게 보고 싶지 않다. 광대에게 보인 그의 미소는 반어적이다. 스스로 극장 지하의 어둡고 비좁은 공간에 유폐했던 삶이야말로 그가 ‘가급적’ 살아 있던 삶이었다. 리어로서 마지막까지 숨을 쉬었던 찬란한 삶. 이제 그는 리어를 떠나려 하고 있다. 물리적으로 목을 매는 대신 연명치료를 받으며 삶을 연장하던 그는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산소호흡기를 떼기로 한다. 이 공간에서 나간다는 건 또 다른 의미에서의 죽음과 같다. 혹은 그 삶이 ‘가급적’ 살아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극단76의 정통 연극 ‘리어의 역’은 다음 달 5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관객을 기다린다. 사진=주다컬쳐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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