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제2차 세계대전의 회상과 추모
1945년 4월 30일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나치 정권의 전쟁은 끝이 났다. 유럽에서의 길고도 참혹했던 전쟁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전쟁의 전반적인 주도권은 미국에 있었으나 일본의 강력한 저항으로 지루한 소모전 양상으로 바뀌고 있었다. 1945년 들어 일본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상실했다. 미국은 일본 본토에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고 일본군은 태평양지역의 이오지마, 오키나와 등 일부 섬을 중심으로 옥쇄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종말무기의 등장과 최후의 일격
이오지마전투에선 미군이 약 7000명 전사하고, 일본군은 2만여 명이 사망했다. 오키나와전투는 더 치열해 미군 1만4000여 명이 사망하고 일본군 9만여 명이 전사했다. 미국으로선 유럽의 전쟁이 끝난 상황이어서 태평양전쟁도 하루빨리 정리하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일본 본토 상륙계획을 검토했으나 수십만 명의 미군 사상자 발생이 예상됐고, 독소전쟁을 승리로 이끈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할 경우 아시아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했다.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영국·소련의 정상회담에서 정상들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이 시기 인류가 지구상에 단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던 종말무기가 등장했는데, 바로 핵무기였다. 1942년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이 핵무기 개발을 시도한다는 첩보를 토대로 영국·캐나다 등의 협력 아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일명 ‘맨해튼 프로젝트’)을 시작했고, 마침내 1945년 7월 핵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결국 미국은 핵무기 공격 카드를 꺼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발의 핵폭탄이 투하됐다. 그 가공할 위력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이 났다.
히로시마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애가
폴란드의 작곡가로 20세기 현대 서양음악을 대표하는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1933~2020)는 ‘히로시마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애가’를 작곡했다. 1960년에 탄생한 이 음악이 처음부터 히로시마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작곡한 곡은 아니었다. 원래 이 곡의 제목은 연주시간인 ‘8분37초’로 하려고 했으나 곡을 완성한 뒤 느껴지는 큰 슬픔과 비극을 담아 제목을 변경했고,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편지와 함께 히로시마시장에게 보내졌다.
모두 52대의 현악기(바이올린 24대, 비올라 10대, 첼로 10대, 더블베이스 8대)를 활용해 기존의 전통적 화성에서 벗어나 특수한 주법과 음계를 사용한 게 특징이다. 아마도 이는 전쟁의 처참함과 공포를 극대화된 긴장감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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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교향곡과 전쟁소나타
제2차 세계대전의 독소전역 중 소련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1941년), 교향곡 8번 ‘스탈린그라드’(1943년), 소련의 승리를 기념하는 교향곡 9번 ‘승리의 교향곡’(1945년)을 작곡했다. 이를 흔히 ‘전쟁교향곡’이라고 부른다. 각각 독일의 레닌그라드 포위전과 스탈린그라드전투, 소련이 반격을 가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한 음악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지난 연재 글에서 소개한 바 있다. 독일의 소련 침공을 배경으로 하는 ‘전쟁소나타’도 있다. 소련의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가 작곡한 피아노소나타 6, 7, 8번을 부르는 말이다. 이들 곡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에 시작해 1940년, 1942년, 1944년에 각각 완성했다.
특히 7번은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피아노소나타 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곡가가 붙인 부제는 아니지만 ‘스탈린그라드’로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전쟁기간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전쟁에 따른 음울하면서 어두운 모습,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치열한 현장 분위기가 잘 나타나 그렇게 불리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오시프 스탈린 정부로부터 압박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전쟁 속의 인간을 묘사한 작품들로, 그의 다른 작품보다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며 음울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모두 3악장으로 구성돼 있다.
1악장은 역동적이고 리듬 있게 전개되고, 2악장은 매우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3악장은 클라이맥스다. 타악기들을 공격적으로 두드리는 듯한 강렬하고 극적인 기세로 몰아붙이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아마도 전쟁터의 실상과 정신적 충격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듯하다. 3악장은 꼭 한 번 들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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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전쟁레퀴엠’
전쟁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곡돼 많이 알려진 곡도 있다. 바로 영국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1913~1976)의 ‘전쟁레퀴엠(War Requiem), Op. 66’이다. 독일이 1940년 11월 영국에 대대적인 폭격기 공습을 감행함에 따라 중부의 코번트리라는 지역은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도시 전체가 파괴되는 피해를 당했다. 이 지역은 산업시설이 많아 군수품 조달이 잦다는 이유로 독일군이 전쟁기간 40회가 넘는 공중폭격을 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코번트리 성 마이클 대성당도 외벽만 남고 거의 파괴됐다.
전쟁이 끝난 뒤 1956년 복구공사가 시작됐다. 전쟁 참상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파괴됐던 벽체를 그대로 보존한 채 그 옆에 재건축이 이뤄졌고, 1962년 완공됐다. 1962년 5월 전쟁의 상처를 딛고 다시 우뚝 선 대성당의 봉헌식이 진행됐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져 사용된 곡이 브리튼의 ‘전쟁레퀴엠’이다. 한편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친구들을 추모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브리튼은 이 곡을 1961년에 시작해 1962년 완성했다. 가사의 소재는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미사곡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종전 1주 전 전사한 영국의 시인 윌프레드 오언(1893~1918)이 쓴 9편의 시를 활용했다. 오언 자신이 참전해 전쟁터에서 겪은 참상을 상세히 묘사한 시가 브리튼의 ‘전쟁레퀴엠’ 속에 흐르며 전쟁의 공포와 슬픔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곡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음악은 이외에도 많다. 영화와 연극, 미술 등 예술 전 분야에 걸쳐 다뤄졌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아마도 전쟁의 상처가 그만큼 크고 깊어서일 것이다. 히틀러와 나치가 사용했던 음악, 즉 베토벤·바그너·브루크너 등의 음악이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곡은 아니다. 나치가 이 음악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음악은 사람들을 때로는 웃게 하고 슬프게도 하며, 때론 흥분하게도 한다. 선전·선동으로 전쟁을 외치던 나치는 음악으로 사람들을 자극하고 격동적으로 만들어 전쟁의 한가운데로 몰아넣었다. 전쟁이 끝나자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은 희생된 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전쟁사의 이해, 강군으로 가는 길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 목적과 수단, 방법 등이 달라졌을 뿐이다. 전쟁은 반드시 억제돼야 한다. 전쟁을 억제하는 것도 국력이고 강한 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전쟁사의 이해는 전장의 긴박한 상황에서 사고를 유연하게 만드는 지혜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전쟁사에 능통한 전문가가 많은 군대가 돼야 한다.
군대의 강함은 부드러움과 융합될 때 진짜 강해질 수 있다. 문무를 겸비한 군인,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에서도 여유를 갖고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힘은 인문학적 정서와 같은 부드러움이 겸비될 때 빛이 난다. 전쟁사 속에 감춰진 클래식 음악과 함께하는 전쟁사의 이해는 인문학적 소양을 풍부하게 하고 전쟁사 전문가로 거듭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그동안 ‘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연재를 애독해 주신 많은 독자분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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