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륙함(LST)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함장 직책을 수행하는 동안 하루하루가 특별하게 다가왔고, 더 나아가 소중함을 느낀다. 상륙함은 안정적이면서도 위험하고, 작은 파도에 휘청거리지만 수로 안으로 들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척 고요해진다. 대원들은 각자 위치에서 묵묵히 역할을 다하다가도 위험에 처할 때면 즉시 하나로 뭉친다. 고준봉급 상륙함은 대한민국 상륙작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적 해안에 직접 접안하는 전술인 ‘전투접안’은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부터 이어져 왔으며 운봉급 상륙함이 베트남전쟁 등 약 50년간 이어 온 운용 역사를 우리 함은 1994년부터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그동안 빠른 템포 속에서 모두가 정신없이 살아왔음을 문득 깨닫는다. 주어진 소명을 다하기 위해 거친 파도와 위험, 고된 세월 속에 33년간 수많은 장병이 이 배를 빠르게 거쳐 갔다. 사람도 사람이거니와 함정은 더욱 굳건히 그 자리에서 해군·해병대 상륙작전의 역사를 묵묵히 이어 나가고 있다.
함장이 돼서야 비로소 부대 전체를 조망하고 통찰할 수 있게 된 듯하다. 고준봉함이라는 배와 80여 명의 대원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가 이전과 크게 달라졌음을 느낀다. 그러면서 더욱 자주 다르게 느끼는 게 있다.
이 배는 느림이 미학이다. 속력이 느리다기보다 배의 시간이 느리게 간다. 항상 그 자리에서 바다와 함께 사람을 떠나보내고 맞이하며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어 왔다. 입항할 때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조급해하면 배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난 황소처럼 사나워진다. 이 배와 호흡을 맞추며 느리게 움직이면 비로소 배는 조용하고 천천히 아름답게 움직인다.
1년이 지나가는 시점이지만 조함을 할 때마다 그 느림은 더욱 강렬하다. 배의 호흡을 느끼며 더욱 느리게 조함하려 한다. 그러면 배는 대답한다. 물 위를 아주 천천히 미끄러지는 순간 이상하게도 별다른 지시 없이 기다려 주면 배는 부두에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다가간다. 그 순간 갑판에 나온 모두는 깊은 안전함을 느낀다. 마치 생명력이 있는 사람처럼 배는 묵묵히 우리를 지켜보는 듯하다. 때로는 경고를 건네기도 한다.
33년이라는 시간 동안 천천히 그 자리에서 바다가 부르는 때를 기다린다. 어느덧 이 배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선체는 녹슬고 얇아졌으며, 곳곳의 장비들이 말을 듣지 않기도 한다. 배의 호흡이 길어짐을 체감한다. 하지만 함장을 맡으며 얻은 확신이 있다. 이 배는 온몸으로 거센 파도와 바람을 막아 주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확신이 있기에 나 역시 더 느리게 이 배를 느끼면서 나아가려 한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잠시 놀러 온 우리를 온전히 받아 주고 지켜 주고 있음에 겸허한 마음으로 이 배를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다.
함장으로서 교만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한 사람을 온전히 알지 못하듯 이 배 역시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이가 있을 터. 느릴수록 안전하고, 느리기에 바다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으며, 때로는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우리의 상륙함 운용 역사가 1955년부터 벌써 70년이 지났다. 수많은 장병의 땀과 숨결이 묻어 있는 이 공간이 여전히 존재함에 특별함을 느낀다. 앞으로도 계속 소중함을 느끼고 싶다. 오늘 하루도 느리지만 안전하게 나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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