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그들이 온다 - 정치권 파고드는 영향력 공작
美 LA 인근 아카디아 시장 에일린 왕
정치 캠페인·언론 활동 통해 中 대변
불법 대리인 활동 기소돼 ‘혐의’ 인정
英·호주·캐나다서도 유사 사례 ‘반복’
외국 정보기관 외부 물리적 공격 대신
풀뿌리 민주주의로 침투 가능성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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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장이 된 중국 스파이
지난달 11일 미국 법무부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인근 부촌인 아카디아의 시장 에일린 왕을 중국 정부를 위한 불법 대리인(Illegal Agent) 혐의로 기소했다고 발표했다. 아카디아는 시의원들이 돌아가면서 시장을 맡는데 2022년 시의원에 당선된 왕은 2020~2022년 중국의 통제를 받아 친중 성향의 선전 활동을 수행했다는 혐의를 인정하고 시장직에서 사임했다.
30년 전 미국으로 이주한 왕 전 시장은 중국 국적 약혼자였던 마이크 쑨과 함께 뉴스 웹사이트 ‘US 뉴스센터’를 운영하며 중국계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고 한다. 이들은 단순히 친중 콘텐츠를 게재한 것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부의 구체적 지령을 받아 콘텐츠를 제작하고 결과를 보고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2021년 6월 국제적 비난을 받았던 신장위구르지역 강제노역 및 인권침해와 관련, 그런 사실이 없다는 기고문을 게시한 것도 중국 당국이 SNS인 위챗을 통해 지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회수가 많다며 칭찬한 중국 관리자에게 “감사합니다, 지도자님”이라는 답신을 보낸 것을 보면 지시·보고 체계를 갖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왕 전 시장은 정치 캠페인과 언론 활동을 통해 중국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개인적 일탈을 넘어 최근 각국이 우려하고 있는 중국의 영향력 공작(Influence Operation) 사례로 평가된다. 그와 함께 사이트를 운영한 쑨은 이미 지난 2월 중국 정부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한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상태라 그가 혐의를 벗어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 검찰은 쑨이 미국 내 중국 관련 여론을 왜곡하고 반중 단체를 감시했으며 왕 전 시장을 미국 정치권의 스타로 만들려는 공작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결국 왕 전 시장은 최대 10년형을 받을 수 있는 외국 정부 불법 대리인 혐의를 인정했다. 미국의 외국대리인등록법(Foreign Agent Registration Act)은 외국을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은 미리 법무부에 등록하도록 하고 있어 주요 인사를 포섭해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끌고 가려는 외국의 영향력 공작에 대응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FBI 국장 캐시 파텔은 X를 통해 “중국 공산당은 미국 지방 공직자를 육성해 더 높은 직위로 올라가기를 기대한다”며 “미국 기관 전반에 걸친 이런 종류의 영향력 공작을 뿌리 뽑겠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은 지방정부라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 단위조차 외국 정보기관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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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 파고드는 외국의 영향력 공작
이미 미국과 다른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2015년 캘리포니아주 연방하원의원 에릭 스왈웰의 선거 캠페인에 참여했던 중국 정보기관 연계 인물 크리스틴 팡(일명 팡 팡)이 정치인과 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음이 FBI 조사로 드러났다. 그가 중국으로 도피하는 바람에 상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성적 매력을 활용하는 허니트랩(Honey Trap)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스왈웰 의원이 당시 하원 정보위원회 CIA 소위원회의 간사였음을 고려할 때 FBI가 방첩 차원에서 사전 경고를 통한 차단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미국 정보기관의 기밀이 지속적으로 유출됐을 가능성이 크다.
영국에서는 2022년 방첩기관인 MI5가 중진 국회의원들에게 후원금을 제공하며 친중 입장을 확산하는 활동을 해온 중국계 변호사 크리스틴 리가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부와 연계돼 있다고 공개해 충격을 줬다. 2023년 3월에는 의원 보좌관이자 의회 연구원인 크리스토퍼 캐시와 중국 거주 컨설턴트 크리스토퍼 베리가 중국을 위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다. 중국에 거주하는 베리가 중국 정보요원으로부터 수집 지시를 받으면 영국의 캐시가 수집해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캐시는 강경 보수당 위원들 모임인 ‘차이나 리서치그룹’ 간사까지 맡아 영국의 대중국 전략과 비공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도 2021년 총선 당시 중국 정부가 보수당 의원 케니 추 등 여러 명의 후보를 겨냥해 중국계 유권자들에게 ‘반중 후보’라는 인식을 퍼뜨리며 낙선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정보기관(CSIS)이 확인했다. 호주에서는 2017년 노동당의 샘 데스티에리 의원이 중국인 후원자에게 “호주 정보기관이 당신의 휴대전화를 감청하고 있다”고 알려준 혐의로 의원직에서 물러났고, 2022년 2월에는 호주 방첩기관(ASIO)이 “중국 정보기관이 호주 총선에 친중 인사들을 당선시키려 한 시도를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 사건들은 특정 국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국가 전반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위험성을 보여준다.
이미 20016년 미국 대선에 러시아 정보기관이 개입해 특정 후보 당선을 위해 경쟁 후보의 취약점을 흘리고, 유권자의 심리를 이용해 선거에 개입한 것은 미국 국가정보장실(DNI) 보고서를 통해 밝혀졌다. 당시 보고서에 언급된 것처럼 영향력 공작은 단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론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모든 국가에 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외세 간섭 배제 대책 시급
왕 전 시장 사건은 단순히 한 지방 정치인의 몰락이 아니라 외국 정보기관이 민주주의 제도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까지 침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신호다. FBI 국장이 왕 전 시장 사건에 대해 ‘정치인 대상 영향력 공작’으로 단정한 것도 ‘외국 정보기관의 위협은 전통적 간첩행위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지도층, 언론, 시민단체, 지방 정치인을 활용한 영향력 공작의 형태로도 나타난다’는 FBI의 최근 방첩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외국 정보기관은 해외 교민 커뮤니티와 단체를 활용하고 정치 후원금과 언론 매체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며 개인적 관계를 통해 정치인과 주변 인물을 포섭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후보자 간 지지율 차이가 박빙인 경우 선거 결과를 바꾸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공작은 민주주의의 투명성과 자율성을 잠식하며,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 미국은 일찍이 1938년 제정된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을 통해 사전에 등록하지 않고 외국 정부나 단체를 위해 활동하는 것을 처벌함으로써 외세 영향력이 미치는 공작에 대비하고 있으며, 호주·영국·캐나다도 최근 유사한 법적 장치를 마련했다.
우리나라 역시 외국 정보기관의 정치적 영향력 공작 대상이라는 점을 하루빨리 인식하고, 외국 대리인 등록제 도입, 정치자금 투명성 강화, 정보기관과 선거관리 당국의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민주주의 국가는 외부의 물리적 공격보다 내부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침투와 영향력 공작에 더 취약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번 사건은 우리가 경각심을 갖고 투명성과 경계심을 강화하지 않는다면 외세 개입을 통해 민주주의 체제가 내부로부터 잠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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