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원효로 이금자 씨네가 겪은 6·25전쟁
6월 초 구보는 손위 동서와 함께 1950년을 되짚어보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동서의 누님 이금자(1940~ ) 씨가 작성한 비망록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현장에서 재구성하는 작업이었다.
이씨는 60세 되던 해에 기억을 되살려 일기 형식으로 당시를 기록해 놓았다. 자신이 겪은 전쟁을 후손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회상의 시작은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 17번지였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이씨가 부모님, 두 동생과 함께 살던 곳이었다.
6월 25일 오전, 이씨의 부친 이영래 씨가 다급히 뛰어 들어와 벽에 걸린 사진과 상장을 모두 떼어 부엌 아궁이에 던져 넣고선, 빨래를 널고 있던 어머니 김순례 씨에게 “공산당이 쳐들어왔다”며 피란해야 한다고 다급히 말해 식구들을 아연하게 했다.
다시 어디론가 뛰어나갔다 돌아온 아버지는 가족 5명을 모두 이끌고 집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십자병원으로 가 그 집 마당에 있던 방공호로 들어갔다. 마을의 다른 두 집 가족들이 먼저 와 있었다. 새우잠을 자고 난 이튿날 들락날락하며 바깥 사정을 알아보던 아버지가 ‘인민군이 미아리까지 왔다’는 소식을 전하자 방공호는 일순 공포에 휩싸였다.
숨죽여 듣는 라디오에서는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서울은 절대 뺏기지 않습니다”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문이 반복해서 쏟아졌다. 그러나 시내 상황은 극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6월 27일 아버지는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돌아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려움 속에서 밤을 꼬박 새운 다음 날 새벽 아버지가 바깥을 살피려 문을 살짝 열었는데 그 순간 천둥번개가 치듯 굉음과 불빛이 지하로 쏟아졌다. 아버지가 깜짝 놀라 문을 닫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로소 전쟁을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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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몸을 움츠려 어머니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머니의 가슴도 요동치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갔던 이웃 아저씨가 ‘큰일 났다’며 ‘새벽에 한강 다리가 잘렸다’고 절규했다. 다리가 폭파되면서 많은 차량이 강으로 곤두박질했다는 처참한 상황도 전했다. 어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이제 어떡해야 하나’ 궁리에 빠졌다.
대한청년회 회장에 용산구 의용소방대 대장이던 아버지는 심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장기화 조짐이 보이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다락에 숨어 지냈다. 집 밖은 탱크 소리로 요란했다. 금자 씨는 사람들 틈에 끼어 길가에서 인민군 행렬을 구경했다. 어떤 사람이 붉은 깃발을 나눠주며 만세를 부르라고 종용했다.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민군 만세”를 토해냈다. 다른 세상이 된 듯했으나 일상은 그 전처럼 이어졌다.
남정초등학교에는 머리를 빡빡 깎은 군인들이 교사 앞에 줄지어 누워 있어 평소의 학교 모습이 아니었지만,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뛰어놀았다. 붉은 띠를 팔에 두른 아이는 자기 아빠가 ‘좋은 거라며 차고 다니라’고 했다고 으스댔다. 조회에서 교장선생님이 ‘오늘은 노래 공부만 하자’고 말해 음악 선생님이 지휘를 하고 다른 교사가 풍금을 쳤다.
날이 지나면서 양식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가게에 건설 자재는 많았으나 식량은 없었다. 옷가지와 패물을 팔아 끼니를 장만하는 게 큰 과제였다. 어른들은 ‘유엔군이 우리를 도우러 왔다’면서 하루빨리 서울이 수복되기를 고대했으나 전황은 점차 나빠졌다. 서울 이곳저곳이 폭격을 당해 집들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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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오전 요란한 따발총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비행기 굉음과 가공할 폭격음이 함께 들려왔다. 온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였다. 가게 문에 기대 서 있던 아버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 공군이 용산 일대를 공습한 날이었다.
부모님은 ‘시골로 피란 가야 한다’며 짐을 꾸렸다. 아버지는 멜빵을 이용해 보따리를 두 어깨에 메고 그 위에 어린 남동생 철구(1948~ )를 앉혔다. 어머니는 쌀 한 말을 머리에 이고 보따리를 들었고, 금자 씨는 여동생 금순(1946~)의 손을 잡고 뒤를 따랐다. 어린 마음에는 온 가족이 함께 소풍 가는 기분이었다.
용산경찰서 건물을 지나다가 깜짝 놀랐다. 붉은 벽돌 표면이 온통 총탄 자국이었다. 효창공원을 지나 마포로 향하는데 많은 사람이 몰려나와 큰 행렬을 이뤘다. 팔 한 쪽을 잃은 채 피를 흘리며 울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마포서부터 광화문, 종로를 거쳐 미아리 고개를 넘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함께 가던 동네 친구의 외가에서 하루를 묵은 후 산길로 들어가 절에서 이틀을 지내는데 어머니가 ‘다들 남쪽으로 가는데 우리는 왜 북쪽으로 가느냐’고 문제 제기를 했다. 아버지는 ‘남쪽에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서 가다간 죽는다’며 설득했지만, 어머니는 삼남매를 데리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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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일행이 모두 어머니를 쫓아 한강 쪽으로 향했다. 이촌동 한강변에는 작은 배가 수십 척 모여 돈을 받고 강을 건네주고 있었다. 피란민 수천 명이 북새통을 이뤘다. 이씨 네 가족은 끊긴 인도교 아래에 가설된 부교를 건너 난곡의 고모네로 향했다. 막상 도착하니 여러 집 식구들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모기장을 친 채로 밤을 지새웠다.
임신 중이던 어머니는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무거운 몸임에도 아버지와 함께 포도 장사를 하러 나가셨다.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전쟁보다 무거운 현실이었다. 금자 씨는 부모님이 일 나가시는 동안 동생들을 돌봤다.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보리쌀에 쌀을 조금 섞어 우물물로 밥을 지어 동생들을 먹였다. 부드러운 ‘꽁보리밥’을 짓기 위해 보리를 박박 문지르곤 했다. 쌀밥 쪽은 남동생을 먹였다. 어둑해서야 새까만 모습으로 돌아오는 부모님을 보면 안쓰러우면서도 안심이 되곤 했다.
동생 기저귀를 빨기 위해 논둑 건너 개울가로 갈 때는 늘 긴장됐다.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몰랐다. 그렇게 석 달을 지내다 서울이 수복돼 원효로 집으로 돌아왔으나 겨울에 다시 피란을 떠나야 했다. 중공군 탓이었다. 아기를 갓 출산한 어머니는 힘들어했으나 동네가 텅 비게 되자 할 수 없이 길에 올랐다.
젖이 안 나오던 어머니는 백설기 한 조각을 양은그릇에 넣고 물을 부어 끓여 아기를 먹이며 그 겨울 먼 길을 걸었다. 전쟁은 전쟁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잔혹성과 야만성을 드러내며 무방비 상태의 피란민들을 괴롭혔다. 1950년 한국의 시간은 참혹했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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