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입력 2026. 06. 15   16:03
업데이트 2026. 06. 15   16:05
0 댓글
홍제표 CBS 정치부 선임기자
홍제표 CBS 정치부 선임기자

 
임진왜란 7년 전쟁에서 왜의 최대 전리품은 조선 도공이 아닐까 싶다. 끌려간 도공 가운데 일부가 ‘심수관’ 가문을 이루고 일본 도자기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게 일본 도자기는 19세기 유럽 상류사회를 매료시킨 일본풍 ‘자포니즘(Japonism)’의 주축이 됐다.

유럽은 앞서 중국 ‘청화백자’에 매료된 상태였다. 얇지만 단단하고 빛이 나는 청화백자는 ‘하얀 금(金)’으로 불릴 만큼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그러나 명(明)·청(淸) 교체의 혼란기에 명맥이 끊겼고, 그 틈을 ‘메이드 인 재팬’이 차지했다. 일본이 장차 동양의 패권을 잡으리란 것이 유럽 문화지도에 미리 그려진 셈이다.

쇄국으로 문을 잠근 채 기력이 쇠한 조선으로선 이런 사정을 알 리 만무했다. 청화백자보다 시기상 앞섰던 고려청자 제조국의 후예로서 땅을 칠 일이다. 그 전통이 조선백자 이후로까지 계승·발전됐더라면 ‘K컬처’의 발현은 더 빠르지 않았을까.

21세기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실리콘을 원료로 하는 도자기는 당시 하이테크 제품이었다. 조선이 그 우수한 도자기 엔지니어들을 잘 지켰다면 역사의 판도도 크게 달라졌을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은 그럴 능력도, 식견도 부족했다. 조선의 ‘심수관’은 천한 장인 신분에 묶여 꿈을 펼칠 기회조차 없었다.

세계는 다시 치열한 과학·기술전쟁에 나섰고, 그 요체는 우수 인재 확보에 있다. 인공지능(AI)과 양자기술 등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미래 기술의 선점 여부가 국가 흥망을 가른다. 오로지 두뇌의 힘만으로 운명을 개척해 온 대한민국이 누구보다 잘 아는 사실이다. 만약 ‘공대에 미친 중국, 의대에 미친 한국’ 같은 퇴행이 지속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대한민국의 급선무 중 하나는 인재 유출 방지와 우수 두뇌 유치다. 그러기 위해선 사회적 개방성이 중요하다. 16~17세기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제국은 유대인 추방 등 폐쇄성으로 몰락을 자초했다. 반면 스페인의 식민지 네덜란드는 척박하고 작은 나라였지만 쫓겨난 유대인을 흡수하며 패권국으로 변신했다.

거대한 옆 나라 중국에 비해 인구 자체가 절대 열세인 우리로선 개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올림픽을 예로 들면 호주나 네덜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은 우리보다 인구가 훨씬 적음에도 좋은 성적을 낸다. 덩치는 작지만 일당백의 맨파워로 승부하는 것이다.

인력 평가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웅비하게 한 것은 국가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큰 엘리트의 힘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조선 도공처럼 괄시받거나 애물단지 신세였던 이들의 공이 크다. 음악, 영화, 음식 등에 이르기까지 온갖 ‘K’ 시리즈의 선도자들은 대개 그늘에 가려진 존재였고 명문대 법대나 의대 출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큼 다가온 AI 시대는 인간의 능력 척도를 다시 쓰게 한다. 챗GPT의 아버지 샘 올트먼 같은 이들은 대학교육 무용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이 거대한 변화 앞에서 우리의 현실은 깊은 우려를 자아낸다.

한 번의 대입시험으로 거의 평생이 좌우되는 학벌의 경직성, 그 시험에 투여되는 막대한 사교육비를 매개로 한 사실상의 부의 세습, 출발선이 다른 데서 비롯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좁혀지기 힘든 간극은 망국적 폐단과 다름없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듯이 누가 진짜 재목인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바라볼 때가 됐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