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무덤... 그래도 그들은 날아올랐다

입력 2026. 06. 12   16:14
업데이트 2026. 06. 14   13:47
0 댓글

『전쟁과 영화』
 마스터스 오브 디 에어(2024)
제작: 스티븐 스필버그, 톰 행크스
출연: 오스틴 버틀러(게일 클레븐 소령), 캘럼 터너(존 이건 소령), 배리 키오건(커티스 비딕 소위), 네이트 만(로지 로젠탈 소령), 앤서니 보일(해리 크로즈비 소령)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독일과 유럽의 하늘에서 싸운 미 8공군은 유럽 전선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부대 중 하나로 2만6000명 이상이 전사했다. 폭격기 승무원들이 25회에 달하는 작전 임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갈 확률은 20%에도 못 미쳤으며, 대부분 5회 이내에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마스터스 오브 디 에어』, 도널드 L. 밀러 지음, 행북 펴냄

 


살아남는 것은 실력이 아닌 확률이었다
1943년 영국 서퍽. 100폭격전대의 B-17 편대 조종사들은 맑은 날이 더 두려웠다. 구름이 걷히면 목표물이 잘 보였지만 독일 전투기도 그들을 더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B-17 한 대에는 10명이 탔다. 조종사, 부조종사, 항법사, 폭격수, 기관총 사수들. 고도 1만 m, 영하 40도. 장갑을 벗으면 손가락이 얼었고 산소호스가 빠지면 의식이 흐려졌다. ‘하늘의 요새’라는 별명과 달리 내부는 얇은 알루미늄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죽음과 마주한 금속관(棺)이었다. 

1943년 8월 17일, 슈바인푸르트·레겐스부르크 폭격 임무는 그 현실을 가장 잔혹하게 드러낸 하루였다. 독일 전투기 공장을 겨냥한 이 작전에서 8공군은 B-17 폭격기 60대를 단 하루에 잃었다. 승무원만 600명. 돌아온 기체들도 멀쩡하지 않았다. 엔진이 불타고, 동체에 파편이 박히고, 부상당한 승무원을 실은 채 활주로에 불시착한 기체들이 줄을 이었다. 미군은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장거리 호위 전투기 없이 폭격기를 보내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소모였다. 같은 해 10월 8일, 100폭격전대는 브레멘 공습에서 기체 7대를 잃었다. 일주일 뒤 두 번의 출격에서 또 12대가 사라졌다. 막사의 침대가 빠르게 비었다. 살아남은 조종사들은 다음 날 아침 그 빈 침대를 지나 식당으로 갔다. 아무도 오래 쳐다보지 않았다. 너무 오래 보면 다음이 자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어서다. 슬픔을 느낄 시간도, 애도를 표할 방법도 없었다. 내일 또 출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블러디 헌드레드(Bloody Hundredth)’라는 별명은 과장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경험은 생존율을 높여 줬지만 경험을 쌓을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이 전쟁의 구조였다. 살아남는 건 실력이 아니라 확률이었다.

전세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44년 초 P-51 머스탱이 장거리 호위에 투입되면서였다. 폭격기의 생존율이 올라갔다. 그러나 호위기가 있어도 대공포는 터졌고 독일 전투기는 달려들었다. 엔진은 불붙었고 사람은 떨어졌다. 기술이 생존 확률을 높일 순 있었지만, 조종석 안의 인간이 느끼는 죽음의 감각까지 지워 주지는 못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8공군은 2만6000명 이상을 잃었다. 유럽 전선에 투입된 미군 전체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부대였다.

100폭격전대 소속 B-17은 ‘하늘의 요새’로 불렸지만, 승무원들에게 이 기체는 도망칠 수 없는 전장이었다. 애플TV+ 제공
100폭격전대 소속 B-17은 ‘하늘의 요새’로 불렸지만, 승무원들에게 이 기체는 도망칠 수 없는 전장이었다. 애플TV+ 제공


스티븐 스필버그·톰 행크스의 제2차 세계대전 3부작
‘밴드 오브 브라더스’(2001)가 유럽 지상전의 전우애를 담았고 ‘더 퍼시픽’(2010)이 태평양 상륙전의 참혹함을 파고들었다면 ‘마스터스 오브 디 에어’(2024)는 1만 m 상공에서 벌어진 또 다른 전쟁을 응시한다. 

그 중심에는 두 실존 인물이 있다. 게일 클레븐 소령(오스틴 버틀러 분)과 존 이건 소령(캘럼 터너 분). 두 사람은 용감하고 매력적이다. 위기에도 유머를 잃지 않고 부하들에게 신뢰를 얻는다. 이들을 영웅으로 포장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이들이 반복해 마주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상실이다. 함께 출격했던 동료가 돌아오지 않고 공중에서 옆 기체가 불덩이가 돼 사라져도 살아남은 자들은 다음 날 다시 비행복을 입는다. 이 작품이 가장 공들여 보여 주는 것은 그 반복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버티는가다.

커티스 비딕 소위(배리 키오건 분)는 가장 아프게 남는 인물이다. 전쟁의 공포와 흥분 사이에서 조금씩 무너져 가는 한 인간을 그는 말보다 눈빛으로 전달한다. 웃고 있지만 눈이 웃지 않는 장면들. 점점 대담해지는 행동 뒤에 숨겨진 균열. 비딕 소위는 그 균열을 천천히 정확하게 보여 준다. 격추 이후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갇힌 승무원들의 이야기는 작품의 두 번째 축이 된다. 하늘의 전쟁에서 살아남아도 땅에서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굶주림, 혹한,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과 살아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짐이 되는 순간들.

작품은 공중전의 스펙터클과 인간의 내면을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제작비 2억 달러를 쏟아부은 이 작품의 공중전 장면들은 역대 전쟁 드라마 중 가장 압도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B-17 편대가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고 독일 전투기가 사이를 가르며 대공포가 하늘을 검은 꽃으로 뒤덮는 모습들.

그러나 카메라는 폭발의 크기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이내 조종석 안으로 들어온다. 산소마스크 뒤에서 떨리는 눈빛, 얼어붙은 손, 무전기 너머로 짧게 들리다가 끊기는 목소리. 드라마가 진짜로 보여 주려는 것은 그 얼굴들이다.

폭격기 승무원의 하루… 영하 40도, 1만 m의 현실

출격은 새벽 3시에 시작됐다. 막사의 불이 켜지면 승무원들은 말없이 일어났다. 병사들은 농담을 했고 담배를 피웠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내일 저녁 식탁에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열복, 두꺼운 비행복, 산소마스크, 양털부츠까지 모두 입는 것만으로 30분이 걸렸다. 이들 장비가 고공에서 생사를 가를 것이다. 브리핑룸에서는 지도 위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오늘의 목표, 항로, 대공포 밀집구역. 예상 손실률이 언급될 땐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활주로의 B-17은 안으로 들어가면 공간이 좁고 차가웠다. 얇은 알루미늄 외피, 좁은 통로, 기관총 자리, 폭탄창, 산소호스. 엔진 4개가 깨어나면 기체 전체가 진동했다. 그 떨림이 발끝에서 가슴까지 전해졌다. 산소마스크 안에 숨이 얼어붙었고, 통신기 너머로는 짧은 명령과 잡음만 들렸다. 아래서는 대공포가 검은 연기 덩어리를 피워 올렸다. 폭발음보다 충격이 먼저 왔다. 기체가 흔들리고, 파편이 외피를 두드리고 어딘가에서 불이 붙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목표지점에 가까워지면 B-17은 피할 수 없었다. 폭격을 위해 직선으로 날아야 했다.

조준하는 동안 기체는 흔들리면 안 된다. 대공포가 쏟아지는 그 시간이 가장 길게 느껴졌다. 조종사는 기체를 붙잡고, 폭격수는 조준기에 얼굴을 붙였다. 폭탄창이 열리고 폭탄이 떨어지는 순간 기체가 갑자기 가벼워졌다. 임무는 끝났다. 하지만 귀환길에 편대를 돌아보면 빈자리가 보인다. 방금 전까지 옆에서 날던 기체가 사라져 있었다. 무전기로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영국 해안선이 보이면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바퀴가 활주로에 닿고 엔진이 꺼지면 문이 열렸다. 누군가는 걸어 나왔다. 누군가는 들것에 실려 나왔다. 누군가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비사들은 기체의 파편 자국을 셌고, 의무병들은 부상자를 옮겼다. 막사로 돌아가면 빈 침대가 하나 더 늘어 있었다. 그것이 하루였다. 그 하루를 25번 버텨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살아서 25번을 채울 확률은 20%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음 날 새벽 3시, 막사의 불은 다시 켜졌다.

필자 김인기는 전자신문인터넷미디어전략연구소장, 전자신문 인터넷온라인편집국장, 테크플러스대표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영화 속 IT교과서』가있다
필자 김인기는 전자신문인터넷미디어전략연구소장, 전자신문 인터넷온라인편집국장, 테크플러스대표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영화 속 IT교과서』가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