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문 이름에 ‘인의예지’(仁義禮智) 넣어 유교적 가치 대변

입력 2026. 06. 11   14:35
업데이트 2026. 06. 1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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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 
 한양도성, 유교 이념과 왕권의 상징 

한양도성은 인왕·북악·남산·낙산 등 네 산을 이으며 조선의 수도를 둘러쌌던 성곽과 성문을 아우른다. ‘서울성곽길’은 18㎞ 남짓이라 하루에 돌 만한 거리다. 옛사람들도 ‘성돌이’라는 이 트레킹을 즐겼다. 구보도 구간별로 걷곤 하는데, 옛 서울의 안과 밖을 파악하고 상상하는 즐거움을 맛본다. 특히 340m 안팎인 북악산과 인왕산에서 내려다보는 굽이진 성곽 모습에 찬탄하곤 한다.

옛 돈의문 자리인 강북삼성병원에서 길을 따라 백악으로 가는 구간은 원근감과 곡선미를 제공한다. 16세기 권율 장군과 그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 20세기 초의 미국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 작곡가 난파 홍영후(1898~1941) 등의 집들이 성곽 곁에 있다.

삼청동에서 북악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숙정문 구간은 4.7㎞인데 계속 오르막이라 걷기가 쉽지 않음에도 지난해에만 25만여 명이 걸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정상인 백악마루에서 서울 시내 전경을 360도로 감상할 수 있는 보상이 따르는 까닭이다. 특히 단풍철이면 도심에서 만추의 풍경 속에 안길 수 있는 공간이다.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문이었으나 개통 당시 도성에 음란한 풍조가 잦아지자 닫아 버렸다(『오주연문장전산고』). 산 아래 창의문이 숙정문 역할을 대신했다.

으뜸 개국공신으로 태조의 신망이 높았던 조준이 지휘해 1395년부터 1년간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쌓은 한양도성은 높이 5~8m, 전체 길이 18.6㎞에 이르는 장대한 구조물이었다. 축성 당시 평지는 흙으로, 산지는 돌로 쌓았으나 세종 때 개축하면서 토성 구간도 모두 석성으로 바꿨다. 처음에는 자연석을 쓰다 숙종 때부터 45㎝ 크기의 장방형으로 다듬어 썼다. 2088m 길이의 낙산 성벽은 시대별로 모양이 다른 성돌을 사용한 흔적을 품고 있다. 북악산 성벽 바위에는 구간 축성을 담당한 고을과 관리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축성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했음을 알게 한다(『한양도성』).

낙산 한양도성. 동대문에서 혜화문까지 2㎞ 남짓 이어진다.
낙산 한양도성. 동대문에서 혜화문까지 2㎞ 남짓 이어진다.


도성 완공 후에도 지세를 헤아려 삼군문(三軍門)에 나눠 맡겨 훼손되는 대로 보수하게 했다. 숙정문 동쪽에서 돈의문 북쪽에 이르기까지 4850보는 훈련도감에, 돈의문 북쪽에서 광희문 남쪽까지와 광희문 남쪽에서 숙정문 동쪽까지 5042보 반은 각각 금위영과 어영청에 맡겼다(『신증동국여지승람』). 보수에는 근처 주민과 네 산의 산지기들도 동원됐다. 

도성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을, 그 사이사이에 4소문을 뒀다. 조선은 성문의 개폐를 엄격히 지켰다. 예외 사항이 있을 때는 반드시 승정원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대전통편』). 4대문에는 내금위(內禁衛) 소속 호군(護軍) 1명과 부장(副將) 1명이 번을 섰다(『만기요람』). 숭례문은 ‘도성의 제1대문’ 다운 위상을 줄곧 견지했다. 1398년 숭례문이 완공됐을 때는 태조가 친히 참관했고(『태조실록』 7년 2월 8일), 명나라 사신들이 입경할 때도 숭례문을 지나게 했다. 조선보빙사의 방미를 도운 공으로 1883년 12월 국빈 방문했던 미국인 퍼시벌 로웰은 그 웅장하고 세련된 모습에 감탄한 바 있다.

“모퉁이를 돌자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조선의 도시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마법사가 빚은 신기루처럼 내 어릴 적 꿈을 상기시켜 주었다(『내 기억 속의 조선』).”

한양도성에는 풍수관도 영향을 미쳤다. 숭례문 현판은 세로로 쓰였는데, 이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함이었다고 전해진다(『한경지략』). 동대문은 수구(水口)가 매우 허하다는 풍수 의견을 좇아 이름에 ‘지(之)’ 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 넉 자로 지어 지맥을 보강했다(『승정원일기』), 선비들은 오행에 입각해 동대문을 ‘청문(靑門)’이라고도 불렀다(『지봉집』). 현판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다(『임하필기』).

한양도성의 동쪽은 지형적으로 고도가 낮고 지세가 완만했다. 방어에 취약한 이 구간을 보완하기 위해 성벽 곳곳에 치성(雉城·성벽에서 바깥으로 돌출된 방어 시설)을 설치했고, 물길을 성 밖으로 내보내는 수문도 뒀다. 그 가운데 현재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구역 안에 자리 잡았던 것이 이간수문(二間水門)이다. 남산에서 발원해 청계천으로 흘러들던 남소문동천(南小門洞川)의 지류가 도성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축조된 두 칸짜리 수문이었다. 배수와 방어를 동시에 담당했던 이 수문의 존재는 오랫동안 땅속에 묻혔다가 2006년 발굴 조사 과정에서 극적으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동대문 역사전시관).

낙산 한양도성은 시대별 성돌을 볼 수 있다.
낙산 한양도성은 시대별 성돌을 볼 수 있다.

 

광희문과 흥인지문(동대문)을 거쳐 낙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은 97개 구간으로 나눠 건설됐다. 장인 수십 명이 구간별로 건설에 투입됐다. 의궤 기록에도 남아 있지만 정길산·성세각·전용선·김몽총 등의 이름들이 브랜드처럼 성돌에 새겨져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국역(國役)에 참여한 장인들의 드높았던 자부심의 발로였을 것으로 이해돼 구보는 뭉클해진다. 

성벽의 높이가 10m 이하로 높지 않았던 데서 보듯이 한양도성은 방어를 기대하기 어려운 건조물이었다. 성문을 제외하면 성을 쌓는 데 49일밖에 걸리지 않은 점도 애당초 실전성(實戰性)을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읽게 한다. 왜란과 호란, 이괄의 난 등 외침과 내란이 있을 때마다 임금이 수도를 버리고 도주했던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한양의 전시 방어 역할은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이 맡았다. 구보는 한양도성이 유교적 가치를 대변하는 데 비중을 둔 관념적 시설이었다고 여긴다. 4대문 명칭에 유교의 가르침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한 글자씩 넣은 게 그 방증이다.

일제강점기 한양도성은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1907년 일제는 내각령 1호로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하고 도성 훼철을 국가사업으로 추진했다. 그해 일본 왕세자 방문을 빌미로 숭례문 좌우 성벽을 철거한 데 이어 평지에 있던 성벽 대부분을 헐었다. 1914년과 1915년에는 소의문과 돈의문을 차례로 부쉈고, 1925년에는 동대문 성벽을 허물고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을 지었다(『도성의 역사』).

정부는 1975년부터 ‘국방 유적 보존 및 정비 사업’을 시작해 꾸준히 성곽을 복원하고 순성길을 정비했다. 구보는 숭례문에서 남산 서쪽을 오르다 복원된 성곽 위로 드리운 노을을 바라보며 황홀해했던 기억이 있다. 성곽 옆에 무리 지어 피어 있는 하얀 억새가 바람에 흩날리던 가을날이었다. 낙산 성벽 정상에서 동소문(혜화문)을 지나 북악으로 꼬리를 물고 내달리는 성곽의 자태에도 반하곤 한다. 한때 왕권의 상징으로서 엄격한 존재였던 한양도성은 관광자원으로 변해 미감을 제공하는 문화유적이 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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