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은 멈췄어도… 독재의 그림자 여전했다

입력 2026. 06. 01   16:44
업데이트 2026. 06. 0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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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Ⅲ
아프리카-우간다 ②

독재자 이디 아민은 우간다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아민의 고문 벙커(Amin Torture Chambers)’는 캄팔라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다. 수많은 목숨이 소문도 없이 사라진 컴컴한 이 지하실이 대표적인 우간다 유적지다. 아민의 생애는 영국 식민지, 부족정치, 우간다 독립 초기의 혼란이 모두 얽혀 있다. 1970년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아민의 독재체제는 지금까지도 우간다인들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우간다 근현대사의 중심 카바카 왕궁
2018년 6월 중국 자본으로 엔테베·캄팔라 구간에 시원한 유료 고속도로가 개통됐다. 교통체증으로 자동차로 2시간 걸리던 시간이 30분으로 단축됐다. 고속도로 주변에는 깔끔하게 정돈된 고급 주택단지도 들어섰다. 우간다의 상류층, 외교관, 사업가들이 주로 거주한다. 그러나 막상 캄팔라에 들어서니 더 어수선했다. 혼잡한 시내도로를 거쳐 찾아간 곳은 ‘카바카 왕궁’이다. 이곳에는 우간다의 근현대사가 모두 응축돼 있다. 19세기 말 이 나라는 영국세력 진출, 왕권 약화, 부족갈등이 겹쳐 있었다. 국왕은 영국에 저항했지만 결국 우간다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1962년 우간다가 독립한 뒤 과거 국왕인 무테사 2세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실제 권력은 총리 오보테의 수중에 있었다. 대통령과 총리의 권력 다툼은 마침내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1966년 5월 오보테의 군대는 왕궁을 공격했는데 이 작전의 지휘관이 바로 아민이었다. 왕궁 정원에는 그날의 비극을 증언하는 불타버린 대통령 승용차, 기관포 등이 전시돼 있다.

‘아민의 고문 벙커’에 지어진 수감자 수용 격실.
‘아민의 고문 벙커’에 지어진 수감자 수용 격실.

 

이디 아민의 권력 장악과 몰락
아민은 1920년대 중반 우간다 북서부 코보코에서 태어났다. 북부 부족들은 전투 기질이 강했다. 그래서 영국 식민정부는 북부 주민을 군 병력으로 적극 모집했다. 아민 역시 자연스럽게 영국군에 합류했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체격이 크고 운동능력이 뛰어났다. 1950년대 우간다 헤비급 복싱 챔피언이 되기도 했다. 1962년 우간다 군이 창설되면서 아민은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정치인 오보테와의 만남은 아민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꿨다. 

앞서 언급한 왕궁 습격 작전의 성공으로 아민은 우간다군의 핵심 실력자로 성장했다. 대통령 오보테는 아민을 견제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1971년 1월 오보테가 해외 순방을 떠난 사이 아민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대규모 숙청, 비밀경찰 운영, 인도인 추방 등으로 우간다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1978년 탄자니아를 침공했다가 오히려 수도 캄팔라가 함락되면서 정권이 붕괴했다. 우간다를 탈출한 아민은 리비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03년 사망했다.

지하 고문실에 얽힌 충격적인 사연
왕궁박물관을 거쳐 내려간 곳은 아민의 ‘지하 고문실’ 현장이었다. 과거 이스라엘 기술자들이 건설한 무기 저장용 지하시설이다. 아민 정권은 이곳을 비밀 구금시설로 개조했다. 현장에는 쇠사슬, 물고문 흔적 등이 남아 있다. 그 당시 매일 저녁 반정부 인사, 군장교, 학생, 정치인, 민간인들이 지하실로 끌려왔다. 

수 개의 콘크리트 격실은 입구까지 수감자로 빼곡히 채워졌다. 푹푹 찌는 고온과 숨 막힘으로 사망자가 속출했다. 참다못한 수감자가 문짝을 부수고 격실에서 탈출하곤 했다. 그러나 탈주자는 무릎 깊이의 물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벙커문 아래 채워진 물에는 이미 탈주자 방지를 위한 고압전류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격실 문 아래를 보니 물에 잠겼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아민의 집권 기간(1971~1979) 중 학살·실종된 사람 수는 10만~3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왕궁은 별천지였다. 매일 밤 아민의 호사스러운 파티가 이어졌다. 아민 정권이 종말을 맞이한 1979년 4월 11일 이후 우간다는 또다시 장기간의 정치불안과 내전에 휩싸였다.

캄팔라의 카바카 왕궁 전경.
캄팔라의 카바카 왕궁 전경.

 

새롭게 펼쳐진 우간다 내전 참상
1979년 아민의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우간다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아민 군대의 잔당, 부족 민병대, 해외 망명세력, 탄자니아군 등 다양한 무장단체들의 다툼으로 우간다는 무법천지였다. ‘아민 타도’라는 목표는 같았지만 내부는 완전히 분열됐다. 1980년 5월 과거의 대통령 오보테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대규모 부정선거 의혹이 터졌다. 이에 무세베니의 ‘국가저항군’이 대정부투쟁을 선언했다. 

수만 명의 국민이 목숨을 잃은 뒤 1986년 1월 26일 무세베니 군대가 캄팔라를 점령했다. 그는 질서회복, 부패척결, 국가재건의 약속으로 집권 초기에는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87년 북부지역에서 ‘신의 저항군’이라는 새로운 반군세력이 나타났다. 이 조직은 소년병 납치, 민간인 학살로 악명이 높았다.

2000년대 초반 반군의 만행은 극에 달했다. 수만 명의 아이들이 납치돼 소년병으로 동원됐다. 반군에 끌려갔다가 도망쳐 온 여성들은 성폭력과 에이즈 감염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1993년 우간다의 에이즈 감염률은 15%까지 치솟았다. 1971년 이후 30년 동안 학살·내전의 희생자는 30만~60만 명, 이재민은 200만 명에 달했다.

독재자들의 권력다툼 후유증을 우간다 국민이 처절한 가난으로 고스란히 뒤집어써야만 했다. 숙소에서 단기 봉사활동으로 우간다에 온 한국 여대생들이 전해준 경험담이다.

“무더운 날씨로 동료 2명이 열사병으로 쓰러졌다. 응급조치할 의사가 없어 한인 교민이 수액을 구해 환자의 팔에 직접 주삿바늘을 꽂았다. 다행히 2시간 후 그 환자들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처럼 열악한 의료환경 속에서 가난한 우간다 시골 주민들은 오늘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사진=필자 제공

캄팔라의 대표적 관광지가 된 ‘아민의 고문 벙커’ 입구.
캄팔라의 대표적 관광지가 된 ‘아민의 고문 벙커’ 입구.

 

필자 신종태는 조선대 초빙교수, 충남대·국간사 외래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세계의 전사적지를 찾아서』 등이 있다.
필자 신종태는 조선대 초빙교수, 충남대·국간사 외래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세계의 전사적지를 찾아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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