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
창덕궁 연경당, 효명세자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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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에 왕가가 아닌 민간 주택이 있다. ‘연경당(演慶堂)’이다. 대문엔 장락문(長樂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오래도록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이다. 집 이름 역시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사랑채·안채·행랑채·서재·후원·정자·뜰 등을 두루 갖춘 양반가의 형태다.
‘선한 향기를 내뿜는다’는 뜻의 책방 선향재(善香齋)도 뒀다. 왕실 가족이 궁가의 격식으로부터 받는 구속감에서 벗어나 편안한 마음으로 쉴 수 있도록 배려한 휴식처였다. 궁궐 안 다른 건물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99칸 집 규모여서 왕실 건물로서 위엄도 놓치지 않았다. 연꽃을 좋아한 숙종이 북악의 물을 끌어다 조성한 애련지(愛蓮池)와 숲, 키 큰 회화나무가 있는 풍경 가운데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연경당 뒤편 언덕에는 농수정(濃繡亭)이란 정자를 세워 구성의 미감을 더했다. 바깥 구경을 하기 힘든 왕족이 사대부가 사는 모습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려는 취지였다는 설명이 있었지만, 처음 보던 순간 구보는 건물 명칭들에서 배려와 사랑, 기원을 읽었다.
이곳은 효명세자(1809~1830)가 대리청정을 하던 1827년에 지은 건축물이다. 세자는 부왕에게 존호(순조)를 올리던 날에 맞춰 이 건물을 완공했다. 병약해진 부왕이 평범한 사대부 가옥에서 편안하게 쉬기를 바라는 효심을 담았다.
왕자가 탄생했을 때 순조 내외는 무척 기뻐했다. 의정부 삼정승을 비롯한 백관들도 창덕궁 인정전 앞뜰에 나아가 탄강 하례를 올렸다. 왕비의 원자 출산이 현종 이후 150년 만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2년 전 첫 왕자를 잃은 뒤 새로 맞은 경사였던 까닭이다. 원자는 세 살 때 세자에 책봉되고 당대 최고 지성들에게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홍석주·심상규·서유구 등이었다. 18세부터는 추사 김정희가 서화를 가르쳤다. 벗 박규수는 조부인 연암 박지원의 문풍을 전달했다. 효명세자는 어린 나이에도 문예적 아취를 드러냈다.
높디높은 북한산, 구름 걷히니 만 겹 병풍이요 / 머리에 지는 해 성곽을 비추는구나
꼭대기에 올라 바라보니 뜻이 끝이 없고 / 만 리 맑은 바람이 마음속으로 드는구나
- 북한산(北漢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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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는 소년 세자가 지은 이 시에서 단순한 산천 묘사를 넘어 군왕의 기상과 포부를 읽는다. 산·구름·해·바람 등 자연을 관조하면서 그 속에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고 있다. ‘만 겹’과 ‘만 리’에서 스케일을 느낀다. ‘뜻이 끝이 없다(無窮意)’는 표현에서 왕도(王道)의 이상을 펼치고자 하는 다짐을 엿본다. 만백성을 굽어살피는 군주가 되려 했던 조부 정조의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사고와 닮았음을 본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을 펴며 부정부패 척결과 탕평인사를 실시했다. 삼사(三司)가 세자의 측근인 우의정 심상규를 탄핵하려 했으나 “대신 관작 삭탈은 무거운 법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며 물리치는 결기를 보였다(『순조실록』 27년 4월 1일).
효명세자는 조부를 무척 흠모했다. 도성 안에 별서를 두던 당시 선비들의 유행을 좇아 후원에 구현한 산거(山居) 이름 ‘기오(寄傲)’는 ‘호방한 마음을 기탁한다’는 의미다. 동궐도에는 ‘이안재(易安齋)’로 표기됐다. 두 단어 모두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남쪽 창에 기대어 호방함을 부려 보니 좁아터진 집이지만 편안함을 알겠노라’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원래 이름은 두보의 시 ‘밤’에서 ‘북두성에 기댄다’를 따 지은 ‘의두합(倚斗閤)’이었다. ‘창’과 ‘별’을 정조대왕으로 삼아 의지하며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싶어 한 것이다. 기오헌 뒤 언덕 너머에는 정조가 지은 규장각이 있었다(국가유산청).
세자는 공식 집무공간인 중희당 뒤편에 처소인 연영합(延英閤)을 짓고 동서로 천지장남지궁(天地長男之宮)과 학몽합(鶴夢閤)을 배치했다. 서편에는 오운루(五雲樓)라는 누각을 뒀다. ‘학이 꿈을 꾸는 집’이란 의미의 학몽합 입구 문에는 한(漢)의 『궁궐소(宮闕疎)』에서 따온 ‘학금(鶴禁)’을 새겨 ‘태자가 거주하는 땅’임을 분명히 했다. 천지장남지궁 역시 ‘천하의 장남인 세자가 사는 거처’라는 자의식을 표현했다. ‘다섯 가지 구름의 누각’을 뜻하는 오운루는 공간의 상서로움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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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는 학과 돌, 구름 같은 자연을 자주 창작 소재로 삼았다. 자신의 호(號)도 학석(鶴石)으로 지었다. 연영합 앞뜰에 구리로 만든 학과 괴석을 마주한 채 쌍으로 배치해 놓고, 이 한 쌍을 주제로 시를 짓기도 했다.
(전략) 산수 사이에 노닒도 헛된 꿈 되었으니 / 응당 들판의 학들에게 미움을 받고 말리
김정집(1808~1859)은 “(구리 학의) 그림자도 회화보다 낫다”며 조형물을 높이 평가했다. 세자는 이곳에서 자신을 보좌하는 시강원 관원들과 자주 어울리곤 했다.
“누각에는 거문고와 술동이가 널렸고, 시렁에 그림과 책이 가득했다.”(학석소회소서)
효명세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 제작을 지휘하면서 연영합의 학을 빠트리지 않았다.
효명세자의 효심은 내재돼 있던 예술 재능을 뿜어내게 했다. 대리청정 중이던 1828년과 1829년, 연경당에서 부왕과 모후를 위한 진작(술을 올림)과 진찬(음식을 올림) 의식을 주관할 때는 연주곡의 곡과 노랫말을 직접 지었다. 『진작의궤』와 『진찬의궤』에 수록된 작품들 중 자작곡만 수십 편에 달한다. 안무에도 빼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춘앵전(봄꾀꼬리의 노래)’은 세자가 직접 안무 개념과 악장을 구상한 독무(獨舞) 형식이고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은 미인이 모란을 꺾는 장면을 형상화한 군무(群舞)다.
‘헌천화(하늘에 바치는 꽃)’와 ‘연화대무(연화대의 춤)’는 흥겨운 가락과 고운 춤선으로 봄날을 더욱 화창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현재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전승되고 있다. 효명세자가 직접 만든 궁중무용은 모두 19개에 달한다(『경헌집(敬軒集)』). 구보는 문화예술을 누릴 줄 알아야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세도정치의 폐해로 어두웠던 시기에 효명세자 덕에 조선의 문화가 짧은 기간이나마 환하게 꽃을 피웠다고 생각한다. 한국 무용계에선 “한국 무용이 효명세자의 전과 후로 나뉜다”고 평한다.
구보는 개혁군주로서 면모를 보였던 효명세자가 장수했다면 조선 후기의 모습이 달라졌을 것으로 여겨 늘 아쉬워한다. 효명세자 사후 순조는 연경당을 자주 찾곤 했다. 재능이 넘쳤으나 슬픔만을 남긴 채 훌쩍 떠나 버린 아들을 향한 감정이 북받쳤을 것임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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