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편지가 만들어낸 진짜 마음의 기록

입력 2026. 05. 26   15:27
업데이트 2026. 05. 26   16:50
0 댓글

백 투 더 스테이지
뮤지컬 ‘팬레터’

1930년대 경성 문인들의 예술과 사랑 이야기
천재 소설가 해진과 그를 동경하는 세훈
‘히카루’란 필명의 팬레터가 불러온 비극
낭만의 시대를 살아낸 문인들의 뜨거운 숨결

뮤지컬 ‘팬레터’의 한 장면. 사진=라이브(주)
뮤지컬 ‘팬레터’의 한 장면. 사진=라이브(주)


이럴 수가. 나는 지금까지 이 작품을 본 적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객석에 앉아 극이 시작되자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았다. 내가 과거에 ‘봤다’고 여긴 것은 완전히 다른 작품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혼동한 작품의 제목은 ‘스모크’였다. 두 작품은 초연 시기, 일제강점기 시대 문인들의 등장 등 닮은 점이 없지 않다. 일부 출연 배우가 겹쳤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망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뮤지컬 ‘팬레터’는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문인들의 예술과 사랑을 다룬 뮤지컬이다. 천재 작가 이상과 김유정, 그리고 순수문학단체 ‘구인회’의 일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탄생한 창작극으로, 2015년 우수 크리에이터 발굴 지원 사업에서 최우수작으로 뽑히며 등장했다. 이번 무대는 다섯 번째 시즌을 마친 뒤 특별히 마련한 앙코르 공연이다.

이야기는 천재 소설가 김해진과 그를 우상으로 삼은 작가 지망생 정세훈, 그리고 의문의 여류작가 히카루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소년 세훈은 일본 유학 시절 외로움을 달래려 문학에 깊이 몰입했다. 그는 동경하는 소설가 해진에게 ‘히카루’라는 여성의 필명으로 팬레터 성격의 편지를 보낸다. 자신의 문학세계를 정확히 꿰뚫고 이해해 주는 이름 모를 이국땅의 팬을 여인으로 오해한 해진은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선생이시여, 슬픔을 안고 계시나이까? 그렇다면 그 슬픔을 나누어 주소서’라는 한 줄의 문장이 결정타가 돼 해진은 마음먹기에 이른다. 그녀를 사랑하기로.

지독한 폐병과 싸우던 해진에게 날아든 히카루의 편지는 삶을 지탱하는 동아줄이었다. 글귀에 매료된 그는 얼굴도 모르는 필자를 ‘생의 반려’라고 확신하며 지독한 짝사랑을 시작한다.

세훈은 경성의 문인 모임인 ‘칠인회’ 작업실에 급사로 들어가 마침내 해진을 조우한다. 자신이 보낸 편지로 인해 해진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지만, 세훈은 사실을 고백할 기회를 끝내 놓친다.

글 쓰는 가짜 자아 ‘히카루’의 탄생 배경에는 소년의 가혹한 가정환경이 자리 잡고 있다. 세훈은 부를 축적한 친일파 부친의 그늘에서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며 성장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가부장적인 폭력 앞에 기를 펴지 못하던 문학 지망생은 가슴속 깊이 묻어둔 거친 야망과 문학적 갈증을 뿜어낼 돌파구로 여류 작가라는 외피를 선택했다. 정신분석학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정신적 감옥에 갇혀 있던 원초적 욕망이 히카루라는 타자로 외현화된 격이다.

나약하고 순종적인 소년과 달리 히카루는 대단히 주체적이며 매혹적인 여성이다. 세훈의 욕망과 해진의 열망이 맞물려 덩치를 키워가는 위험한 신기루다. 소년의 망설임은 내면의 괴물을 깨우는 신호탄이 된다. 해진의 집착을 동력으로 삼아 환상은 한층 매혹적인 실체로 피어오른다.

결국 소년은 자기가 만든 가짜 이름 뒤로 숨어버린다. 해진은 이 위험한 거짓말에 완전히 매료됐다. 폐병으로 쓰러져 가던 그에게 히카루의 연서는 살아갈 유일한 힘이었기 때문이다. 해진은 “그게 누구라도, 편지의 주인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온몸과 마음을 던져 넣는다.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모든 행복이 깨질까 봐 스스로 눈을 가린 꼴이다.

오랜만에 무대에서 본 배우 강필석은 반가웠다. 나는 언제나 그가 세상으로부터 훨씬 더 거대한 평가를 받아 마땅한 배우라고 생각해 왔다. 강필석은 해진이 지닌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중에서 표현해야 할 것들을 노련하게 골라냈다. 대단히 모범적인 해석인데, 작가가 환호할 만한 해진임이 틀림없다. 인물이 가진 순수함과 고지식함, 그리고 문학을 향한 광기가 그의 목소리와 몸짓을 타고 객석으로 온전히 전달된다.

이에 비해 문태유가 연기한 정세훈은 무대 위에서 한결 자유롭게 움직인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가미해 자기통제와 정신분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유약한 소년의 얼굴 뒤로 번뜩이는 광기를 숨긴 그의 연기는 극의 긴장감을 한결 팽팽하게 만든다. 다른 ‘세훈’들. 문성일, 윤소호, 홍기범과는 꽤 다른 세훈일 것이다.

강혜인의 히카루는 정평이 나 있고, 그래서 꼭 한번 보고 싶었다. 이른바 ‘작두를 탄다’는 히카루다. 캐릭터의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 퍼 올린 연기. 해진과 세훈의 사이에 있지만 잠시만 방심하면 정위치를 벗어나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하이라이트에 이르면 마치 해진과 세훈을 연처럼 날리고 있는 히카루를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무대는 불필요한 장치를 최소화하고 거대한 철골구조물과 바닥의 원고지 조명, 거울을 활용해 1930년대의 문학적 공기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구현한다. 세훈의 그림자 뒤로 히카루의 실루엣이 같은 동작을 취하는 연출은 둘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멋진 연출이다.

종이에 손을 베인 세훈에게 해진이 “때로는 종이가 칼보다 더 날카롭다”고 말하는 대사도 기억에 남는다. 결국 두 사람은 불멸의 작품을 남기겠다는 집착과 문장으로 누군가의 영혼을 흔들겠다는 열망이 날카로운 칼날이 돼 서로를 겨누게 된다.

죽음을 앞둔 해진은 세훈의 입을 통해 거짓의 실체를 확인한다. 원망은 없다. ‘히카루’는 남이 만든 사기극이 아니라 해진 스스로 원했던 마음의 투영이었기 때문이다. 해진은 “너의 말들로 버티었다”는 마지막 고백을 통해 소년의 영혼을 가두었던 죄책감의 족쇄를 풀어준다. 가짜가 만들어낸 진짜 위로가 한 인간의 영혼을 완벽하게 구원하는 순간이다.

낭만과 각혈이 뒤섞였던 경성. 문학을 사랑한 이들의 뜨거운 숨결이 담긴 이 걸작 무대는 오는 6월 7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관객을 맞이한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