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숲, 귀로 걷다... 듣는 건축이 만든 새로운 감각의 공간

입력 2026. 05. 21   16:23
업데이트 2026. 05. 21   16:42
0 댓글

우리곁에, 예술
미술관의 문법 ⑤ 듣는 숲…세계 최초 오디오 뮤지엄, 오디움(Audeum) 

오디움 파사드 전경. 오디움 오디오 뮤지엄 제공(사진=이남선)
오디움 파사드 전경. 오디움 오디오 뮤지엄 제공(사진=이남선)


눈을 감아야 제대로 보이는 곳이 있다. 서울 서초구 청계산 자락, 도심과 자연의 경계에 위치한 오디움이 그런 곳이다. 미술관이 시각의 언어로 말을 건넨다면 이곳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각에 집중하는 곳이다. 2024년 6월 문을 연 오디움은 세계 최초의 오디오 전문 박물관으로, 유네스코가 주관하는 2025 베르사유 건축상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으로 선정됐다. 멀리서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은빛 갈대숲 같고, 가까이 다가가면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처럼 보이는 건물. ‘청음’이라는 행위를 뮤지엄의 중심에 놓은 이 공간은 미술관의 문법이 더 이상 시각에만 머물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디움은 오늘날 미술관이 어떻게 확장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실험과 같다.

소리의 숲을 짓다 - 구마 겐고의 건축 언어

오디움의 가장 강렬한 특징은 역시 건축이다. 설계를 맡은 이는 일본인 건축가 구마 겐고다. 그는 목재와 자연 재료를 활용해 건축을 풍경처럼 풀어내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오디움은 그가 한국에서 실현한 첫 번째 뮤지엄 프로젝트다.

구마는 외벽을 두른 2만여 개의 알루미늄 파이프로 된 숲을 건물에 옮겨 놓았다. 수직으로 낙하하는 파이프들은 소나기처럼, 또는 대나무 창살처럼 건물의 피부를 이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며 건물 표면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스스로 “숲속에 비치는 빛의 변화”라고 부른 이 장면은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느껴진다. 건물 후면으로 나 있는 긴 계단은 계곡을 상징한다. 오디움 입구는 건물 전면이 아닌 후면에 있는데, 도시 소음을 지나온 관람객이 건물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아 숲속 계곡을 내려가듯 안으로 들어가게 설계됐다. 입장이 아니라 입문(入門)에 가까운 경험이다. 이렇듯 오디움은 외관과 입구부터 오감으로 체험하는 공간으로 설계됐다. 전시실 벽에는 나무로 단차를 둬 흡음력을 높였고, 편백 향이 복도 사이를 은은하게 채운다. 자연에서 온 소재가 소리를 다독이고, 공간이 그 소리를 품는다.

소리의 여정 - 전시실을 따라 150년을 거슬러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관람객은 ‘듣는 태도’를 배우게 된다. 일반적인 미술관이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작품에 시선을 두게 한다면 오디움은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이곳은 1877년 에디슨의 유성기 발명 이후 약 150년에 걸친 오디오 역사를 수집·보존·연구하는 전문 박물관이다. 초기 축음기부터 빈티지 스피커, 웨스턴 일렉트릭 시스템 같은 희귀 장비까지 방대한 컬렉션을 갖추고 있다. 관람은 가장 위층인 3층에서 시작해 지하 2층 라운지에서 마무리된다. 오디오의 역사를 1960년대부터 19세기까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조로, 마치 현재의 소리에서 출발해 그 근원을 향해 내려가는 여정과 같다. 

1전시실(3층)에서는 1950~1960년대 미국 가정용 하이파이 오디오의 황금기를 만난다. 마란츠, 매킨토시, JBL의 앰프와 스피커들이 전시돼 있다. 오디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스피커로 손꼽히는 JBL 하츠필드와 파라곤도 이 방에 있다. 2전시실(2층)은 1940년대 영화 음향의 양대 산맥을 마주하는 공간이다. 왼쪽엔 미국의 웨스턴 일렉트릭, 오른쪽엔 독일의 클랑필름이 있다. 히틀러가 선전 방송에 사용했다는 클랑필름의 유로딘 스피커가 역사의 무게를 지고 서 있다. 계속해서 내려가다 보면 1924년 제작된 11-A 사운드 시스템, 1937년의 랜싱 아이코닉 스피커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지하 2층 라운지. 이 공간은 오디움의 심장이다. 시각적인 웅장함은 물론 공간 전체를 채우는 농밀한 소리의 밀도는 관람객을 압도한다. 흰 패브릭으로 기둥부터 천장까지 감싼 이 방은 마치 구름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 이곳에 전시된 것은 웨스턴 일렉트릭의 ‘미러포닉(Mirrorphonic)’. 20세기 최고의 극장용 음향 시스템 중 하나로, 패브릭 소재가 음향을 부드럽고 입체적으로 만들어낸다. 도슨트의 설명과 함께 진행되는 청음 프로그램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듣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좋은 소리’가 인간의 영혼에 어떤 파동을 일으키는지를 조용히 일깨워준다. 여기서 듣는 소리는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이 된다.

오디움은 지금 서울에서 가장 예약이 어려운 공간 중 하나다. 주 3일(목~토), 회차당 25명으로 인원을 제한하는 운영 방식 때문이다. 자유 관람 없이 도슨트 안내에 따라 정해진 경로를 90분에서 110분에 걸쳐 함께 이동한다. 이 제한된 불편함은 의도된 것이다. 고가의 빈티지 오디오 시스템을 보호하는 예술적 고집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소리는 시간을 따라 경험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오디움은 소리(Audio)와 박물관(Museum)의 합성어지만 이곳은 시각적인 미학, 나무 향기, 그리고 공간을 타고 흐르는 바람의 결까지 관람객의 감각을 자극한다.

정음(正音) - 좋은 소리를 찾아서
오디움은 KCC 창업주 고(故) 정상영 명예회장의 유산과 정몽진 KCC 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서전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곳으로,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개관 이후 상설전에만 2만5000여 명이 다녀갈 정도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상설전 ‘정음(正音): 소리의 여정’ 외에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휘자 박성준이 선곡한 희귀 LP를 미러포닉 시스템으로 감상하는 ‘렉처: 미러포닉으로 감상하는 클래식 명반’, 오디오 장비와 음악을 함께 즐기는 ‘오디오 콘서트’와 ‘오디오 살롱’ 등이 있다. 최근에는 시각장애인 150여 명을 초청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 워크’를 진행했다. 눈이 아닌 귀로 즐기는 박물관이기에, 이 프로그램은 소리 앞에선 누구도 다르지 않다는 오디움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다. 

취미의 끝은 오디오라는 말이 있다. 한번 그 세계에 발을 들이면 좀처럼 헤어 나오기 어렵다는 뜻이지만, 오디움은 그 세계로 진입하는 문턱을 낮추려 한다. 오디오 전문지식이 없어도 괜찮다. 그저 자리에 앉아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정음(正音). 바른 소리, 좋은 소리를 찾는 여정을 말한다. 오디움은 그 길 위에 세워진 소리를 위한 공간이다.

필자 심지언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사업본부장,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전시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각예술 전문 매체 월간미술의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필자 심지언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사업본부장,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전시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각예술 전문 매체 월간미술의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