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채법(背彩法)의 신록 오월

입력 2026. 05. 18   15:05
업데이트 2026. 05. 1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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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이 되면 나무에 연둣빛이 조금씩 돋아난다. 나무는 지난해의 사계를 기억한다. 여름은 칠흑처럼 짙은 푸름이었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산을 뒤덮던 푸른 나뭇잎은 노란색 낙엽이 돼 땅으로 떨어졌다. 온축의 시간 겨울이 왔다. 푸름은 땅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나무는 푸름을 다지며 봄을 기다렸다. 

봄이 왔다. 햇볕이 땅을 녹이자 얼어 있던 푸름이 녹기 시작했다. 푸름은 모세관을 타고 위로 오른다. 봄을 맞은 나무들은 서둘러 땅 밑으로 뿌리를 내려 푸름을 길어 올리느라 분주해졌다. 땅 밑에 숨어 있던 푸름의 물길이 지표로 올라와 가지 끝에 이르자 부드러운 망울이 생겼다. 그 망울은 잎사귀로 텄다. 가지 끝은 회색이었다가 그 회색은 회청색의 망울이 됐다가 어느 순간 옅은 연두색으로 부푼다.

푸름을 길어 올리는 데도 늦고 빠름이 있다. 어떤 나무는 이파리는 물론 꽃까지 다 피웠는데, 어떤 나무는 여전히 겨울의 기억에 머물면서 봄을 맞는 걸 주저한다. 그 주저함도 오월이 오면 다 끝난다.

오월이 왔다. 산하는 완연하게 푸르다. 드디어 신록 오월이다. 꽃이 피고 진 나무도 있고 꽃을 피우고 있는 나무도 있다. 이파리는 계속 자란다. 푸름도 계속 짙어 가고 있다. 이 무렵의 푸름은 말랑말랑한 연두색부터 짙은 초록까지 여러 푸름의 색층이 겹쳐져 있다. 여러 색실이 섞여 품위 있는 하나의 색상 계열로 완성되는 고급 옷감처럼 채도와 명도가 다른 여러 푸름이 뒤섞여 산하를 찬란한 푸름으로 장식한다. 나무의 푸름은 그림을 그리듯 누군가가 칠한 푸름이 아니다. 온축의 시간이 땅 밑에서부터 길어 올려져 이파리에 고여 생명의 물길이 됐다. 그 물길이 이파리 바깥으로 배어 나온 게 신록 오월의 푸름이다.

그림을 그릴 때 대개는 종이나 비단의 앞면에다 물감을 칠한다. 그런데 동양화에선 종이나 비단 뒷면에다 물감을 발라 그 물감이 앞면으로 배어 나오게 하는 기법을 쓰기도 한다. 이걸 ‘배채법(背彩法)’이라고 한다. 종이가 물감을 품었다가 온축의 시간을 거쳐 다시 뿜어낸다.

물감을 종이 뒤에서 바르면 비효율적이다. 물감의 많은 부분이 종이 뒤에 남고 종이 앞으로 배어 나온 물감은 일부 극소량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효율에도 배채법을 구사하는 이유가 있다. 배채법으로 발색한 색상은 색감이 은은하고 기품이 있다. 안료를 종이나 비단에 달라붙게 하는 아교 등의 미디엄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 박락의 주요 요인이 된다. 배채법을 쓰면 박락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 얼룩이나 변색 등도 잘 발생하지 않는다.

누가 일부러 칠하지도 않았는데 푸름이 저절로 배어 나오는 나무 이파리는 배채법을 많이 닮았다. 그 은은한 푸름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눈앞에서 화려하게 실력을 드러내지 않으나 가만히 있어도 그 실력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사람이 있다. 오랫동안 만났는데 언행에 얼룩이나 변색이 보이지 않는다. 만나고 또 만나도 질리지 않는다.

온축의 배채법을 닮은 사람을 일러 내공을 지녔다고 한다. 자신의 알량한 실력을 부풀려 과장된 몸짓으로 드러내길 좋아하는 요즘 세태에 온축의 시간을 다져 가며 조용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비효율적인 삶이라고 탓할 수 있을까.

추운 겨울을 참아 내고서 봄을 기다려 배어난 이파리의 푸름은 유독 귀하고 아름답다. 추운 겨울보다 더 신산한 세월 속에서 오랫동안 다진 온축의 내공을 가진 자가 이 세상 빛으로 은은하게 드러나는 순간도 그 못지않게 아름답다.

황인 미술평론가
황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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