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 박치기에 환호하고 이만기 포효에 열광했네

입력 2026. 05. 14   15:23
업데이트 2026. 05. 1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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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
‘한국 실내 스포츠의 메카’ 서울 장충체육관

조선시대 어영청 분소 남소영 있던 곳
정조 자주 찾아 무관 뽑는 별시사 시행
육군체육관을 첫 돔식 실내경기장으로
철골 돔 모습으로 리모델링해 재개장
신동파·안세영 등 수많은 스타 탄생
실내 스포츠의 모태이자 위대한 요람

장충체육관 전경. 필자 제공
장충체육관 전경. 필자 제공

 

서울 남산 자락 장충동의 장충체육관은 한국 실내 스포츠의 모태 격이다. 1955년 6월 23일 육군체육관으로 개관한 게 효시였다. 노천 운동장이었다. 1959년 서울시가 인수한 후 1963년 2월 1일 돔식 실내경기장으로 개장했다. 건축가 김정수가 청사진을, 서울대 토목공학과 조교수이던 최종완이 설계도를 그렸다. 건설은 삼부토건이 맡았다. 1948년 창립한 삼부토건은 미군 공사를 맡아 하며 익힌 최신 서구식 공법을 총동원해 장충체육관 건설을 완료했다(서울시설공단).

구보는 “필리핀이 원조 차원에서 지어주었다”는 소문이 낭설임을 확인한다. 2015년 1월 17일 현재의 철골 돔 모습으로 리모델링해 재개장했다. 지상 3층~지하 2층에 연면적 1만1400㎡ , 관람석 4507석을 갖췄다.

이 자리는 조선시대 군사기지였다. 신라호텔과 한국자유총연맹, 국립극장, 장충단공원, 동국대학교 캠퍼스 등을 아우르는 공간이 조선의 수도방위사령부 격인 어영청의 분소로서 한양 남쪽을 지키던 남소영(南小營) 자리였다. 안보를 챙겼던 정조가 자주 찾아와 무관을 뽑는 별시사를 행했다(『정조실록』). 고종 때인 1895년에 200년을 이어오던 남소영이 해체되고, 그 빈 자리에 1900년 초혼단(招魂壇)인 ‘장충단(奬忠壇)’이 들어섰다. 1895년 8월 19일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한 을미사변 때 순사한 장병들을 기리는 장소였다. 1910년 8월 일본 총독부가 장충단을 폐사하고 1919년부터는 벚꽃을 심어 이 일대를 일본인의 공원으로 만들었다. 현재의 장충체육관 자리는 광복 후 공터로 있다가 군 운동장이 됐다. 구보는 남소영 부대의 지문이 작용한 것으로 여긴다. 이곳에 1963년 첫 실내경기장이 들어서면서 구기 종목과 격투기 분야 스포츠가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 경기장에 대한 구보의 첫 기억은 프로레슬러 김일(1929~2006)이다. 김일은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밀항해 한국계 일본인 프로레슬러 역도산(1924~1963)에게서 레슬링을 배웠다. 김일은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와 ‘젊은 삼총사’를 형성하며 주목받았다. 1963년 역도산이 숨지면서 일본 프로레슬링이 쇠퇴하자 귀국했다. 때마침 장충체육관이 건설돼 장영철(1928~2006), 천규덕(1932~2020) 등과 한국 프로레슬링의 주역으로 활동한다. 김일이 왼발을 치켜들며 박치기를 해 상대를 쓰러뜨리고, 장영철이 점프해 두 다리로 상대의 목을 감던 기술과 천규덕이 상대의 가슴을 가격하던 당수는 팬들의 환호를 자아냈다. 1967년 4월 장충체육관에서 김일은 프로레슬링 헤비급 세계 챔피언을 차지해 레슬링 붐을 더욱 가열시켰다.

레슬링이 끝나면 관중은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고양된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장충동에 족발집이 들어선 배경이다. 김일은 일본 프로레슬링의 요청으로 다시 일본에 돌아간 뒤에도 장충체육관에 와서 여러 경기를 치렀다. 1975년 정부 도움으로 정동 MBC의 문화체육관 2층에 개인 도장을 차려 이왕표 등 제자를 양성하기도 했다. 말년에 지병인 고혈압으로 고생하다가 2000년 3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2011년 고향인 전남 고흥에 김일 기념체육관이 개관했다.

장충체육관과 연관 지어지는 두 번째 인물은 권투선수 김기수(1941~1997)다. 1966년 6월 25일 이곳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와 WBA 주니어미들급 타이틀 매치를 가졌다. 김기수가 15라운드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둬 전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의 첫 번째 복싱 세계 챔피언 탄생이었던 까닭이다. 김기수는 1차 방어전도 이곳에서 치렀다. 1969년 은퇴 후 명동에 ‘챔피언’ 다방을 차려 명소로 만들었다.

장충체육관에서 진행된 김일(왼쪽)의 레슬링 경기. 출처=서울시설공단
장충체육관에서 진행된 김일(왼쪽)의 레슬링 경기. 출처=서울시설공단

 

이어 등장한 장충체육관의 스타는 농구선수 신동파(1944~ )였다. 명실공히 ‘한국 농구의 대명사’이던 신동파는 휘문중·고와 연세대, 국가대표를 거쳐 실업팀인 기업은행에서 뛰었다. 1967년부터 1974년까지의 실업팀 시절 750개의 게임에서 3만 점을 기록했을 정도로 득점왕의 면모를 보였다. 1969년 필리핀에서 있었던 아시아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는 혼자서 50득점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신동파에 매료된 필리핀 관중은 신동파의 슛이 들어갈 때마다 ‘파’를 외치며 열광했다. 이후 필리핀은 5년간 신동파의 기업은행을 초청해 친선경기를 벌였다. 당시 필리핀 내 신동파의 인기는 무하마드 알리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고공행진을 계속했다. 장충체육관이 잉태한 스타의 면모였다. 신동파는 장충체육관을 ‘한국 농구의 메카’로 만든 주인공이었다. 여자 농구의 박신자, 배구의 김호철, 유경화, 조혜정, 그리고 여자 탁구의 이에리사 등도 장충체육관에서 신화를 써내려 갔다. 

구보가 기억하는 장충의 마지막 스타는 이만기(1963~ )였다. 한국 씨름판에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킨 ‘모래판의 황제’였다. 천하장사 10번에 장사 타이틀도 47번이나 차지했다. 크지 않은 체구였지만 단단한 실력에 준수한 용모, 깨끗한 매너로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이만기 신화’의 시작은 1983년 4월 13일부터 17일까지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천하장사 씨름 대회’였다. 무명의 대학생 이만기가 강호였던 이준희, 홍현욱을 꺾고 씨름계의 제왕에 등극했다. 구보는 이날 거구의 백두급 장사 이준희를 넘어뜨리고 포효하던 한라급 장사 이만기를 생생히 기억한다. 씨름계 팬덤이 생기던 순간이었다. 이만기의 인기는 그 후 몇 년간 지속됐고, 그 덕에 씨름은 국민 스포츠로서의 위상을 굳혔으며, 장충체육관은 ‘씨름의 성지’로 거듭났다.

장충체육관에서는 지금도 구기와 격투기 종목의 명경기들이 펼쳐진다. 잠실경기장 등 실내경기장이 여럿 생겨나 과거만큼의 위상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스포츠의 중심을 지키고 있다. 2년8개월 동안의 리모델링을 거쳐 2015년 1월 재단장한 후 3년간 누적관객 82만2000명을 기록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경향신문, 2018.1.16).

돌이켜보면 현재의 구기종목과 격투기 종목은 장충체육관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기한 스타들의 뒤를 이어 박찬숙, 이충희, 허재, 장윤창, 강호동, 김민재, 현정화, 유남규, 유승민, 신유빈, 안세영 등의 스타들이 ‘장충의 아들딸’ 맥을 이었다. 구보는 장충체육관이 한국 스포츠의 참으로 위대한 요람이었다고 평가한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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