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인문학-두 도시 이야기 - 프랑스 파리와 중국 청두(上)
좁고 복잡하던 중세 골목
개선문 중심으로 방사형 12대로 만든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 남작,
뒤마는 허물어져 가는 중세의 거리에서
마지막 모습을 작품에 기록했다
삼총사가 활약했던 골목
그들의 숨결까지…
어떤 도시는 지도보다 소설로 먼저 읽힌다. 낯선 거리의 이름보다 먼저 이야기의 결이 마음에 와닿기 때문이다. 건물의 외벽과 골목, 강과 다리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장이 겹겹이 스며 있다. 수백 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지층 위로 소설 속 주인공의 생생한 서사가 흐르는 도시 프랑스 파리와 중국 청두(成都)는 각기 영웅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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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의 언덕, 몽마르트르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보며 상상에 잠기곤 했다. 파리는 대체 어떤 곳이기에 예술과 낭만이 사람과 건물은 물론 골목의 공기마저 가득 채우고 있는 걸까. 그 이유를 기어코 찾아내겠다는 듯 우리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파리를 정신없이 헤매고 다녔다. 어떤 날은 흐르는 코피를 닦아 내며 길을 나서기도 했다. 남들보다 더 많이, 더 깊이 보고 싶었다.
파리를 처음 만나는 여행자는 대개 4개의 장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에펠탑, 개선문, 몽마르트르 언덕, 루브르 박물관. 이 4곳은 곧 파리의 얼굴이다. 관광지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우리도 파리에서만큼은 예외였다.
몽마르트르 언덕은 파리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소다. 한때 수많은 예술가가 머물며 자신만의 시간을 쌓아 올렸고, 가난했지만 자유로웠으며 막막했지만 반짝였던 그들의 숨결은 지금도 골목과 계단마다 스며 있다. 19세기 말에는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같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모여들며 몽마르트르를 보헤미안의 성지로 만들었다.
‘몽마르트르(Montmartre)’라는 이름은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뜻의 ‘몽 데 마르티르(Mont des Martyrs)’에서 유래했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성지로 여겨졌고, 3세기 파리의 초대 주교 성 드니가 순교한 곳으로 전해진다. 언덕 꼭대기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1870~1871년 보불전쟁의 패배와 파리코뮌의 혼란 이후 국가적 속죄의 의미로 건립이 결정됐다. 로마·비잔틴 양식의 이 하얀 성당은 비가 오면 흰 석회암이 칼사이트를 분비해 더욱 희게 빛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낭만을 따라 걷는 파리
한 달을 머물던 숙소에서 시내로 나가려면 에펠탑 옆을 지나야 해 우리는 매일 그 철골구조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 기괴하면서도 묘하게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건축물이었다.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과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1만8038개의 부품을 250만 개의 리벳으로 연결했다. 착공에서 완공까지 단 2년 2개월 5일이 걸렸다. 당시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구조물이었다. 처음엔 흉물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오늘날 에펠탑은 가장 강력한 파리의 상징이 됐다.
에펠탑은 건축물 그 자체로 아름답다기보다 그 탑을 바라보는 여행자들의 상기된 표정과 들뜬 마음이 더해져 비로소 완성된다. 우리는 노을이 질 무렵의 에펠탑을 특히 좋아했다. 노을에 물든 에펠탑은 차가운 철골마저 따뜻한 빛으로 감싸며 그 안에 우리가 알고 있던 파리의 낭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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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의 아치, 개선문
에펠탑의 낭만과는 정반대로 가장 파리답지 않은 이질적인 장소 하나를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개선문을 꼽겠다. 하루에도 한 번쯤 길을 잃는 미로처럼 얽힌 골목의 도시 파리에서 개선문은 낭만을 깨부수는 거 같았다. 신도시 위에 쭉 뻗은 도로처럼 개선문 앞으로 모이는 12개의 방사형 대로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에투알 광장을 중심으로 별 모양처럼 쭉쭉 뻗어 나간 도로가 파리의 다른 골목들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줬다.
나폴레옹 1세의 명령으로 만들기 시작한 개선문은 루이 18세와 루이 필리프를 거쳐 착공 30년 만인 1836년 마침내 완공됐다. 높이 50m, 너비 45m의 이 거대한 아치 아래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를 점령한 독일군이 행진했고, 이어 프랑스 해방군이 그 길을 다시 지나갔다. 개선문은 파리 한복판에 서 있지만 오히려 파리라는 도시가 지닌 낭만보다 질서와 권위, 역사의 무게를 더 또렷하게 드러냈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파리시내로 뻗은 방사형 도로는 나폴레옹 3세와 조르주외젠 오스만 남작이 추진한 파리 개조사업의 결과다. 쿠데타로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 3세는 군대의 신속한 이동과 시위 진압을 위해 개선문으로 모이는 12갈래 대로를 설계했다. 그중 가장 화려한 길이 샹젤리제 거리다. 권력의 계산 위에 놓인 이 거리는 이제 명품숍이 늘어선 파리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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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의 얼굴들
루브르 박물관에 가기 위해 파리 뮤지엄 패스를 구매했다. 하루 종일 작품들 사이를 헤맸다.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다. 대부분의 관람객은 그 앞에 사람이 너무 많아 놀라고, 생각보다 작은 크기의 화폭에 두 번 놀란다. 다행히 미술관 오픈과 함께 달려간 덕분인지 한참 동안 신비로운 모나리자의 얼굴을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발을 더 오래 붙잡아 끈 작품은 따로 있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1830년 7월혁명이 배경이다. 혁명의 혼란과 희망을 함께 담아낸 화폭 속에는 바리케이드가 등장한다. 들라크루아는 이 바리케이드를 딛고 일어선 여신을 통해 ‘민중의 승리’를 극대화했다.
작품 하나하나를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루브르 박물관은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시간을 품은 건물이다. 12세기 말 필리프 2세(필리프 오귀스트)가 센강 서쪽을 지키기 위해 세운 요새에서 시작해 14세기에는 샤를 5세가 왕궁으로 바꿨다. 이어 16세기 프랑수아 1세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전면 재건했고,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긴 뒤에는 한동안 방치됐다. 그러다가 프랑스혁명을 거치며 왕궁은 마침내 모두에게 열려 있는 박물관이 됐다. 요새가 궁전이 되고, 궁전이 미술관이 된 자리 한가운데는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하는 유리 피라미드가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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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다시 그린 두 사람
파리의 랜드마크가 된 4개의 장소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나폴레옹 3세와 당시 센(현 파리) 도지사였던 오스만 남작이다. 4개의 랜드마크가 이런 웅장한 풍경 속에 놓이게 된 데는 19세기 중반 파리를 완전히 새롭게 바꿔 놓은 두 사람의 야심이 있다.
나폴레옹 3세는 영국 망명 시절 런던의 넓은 거리와 공원들을 보며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1848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황제가 되고 싶어 쿠데타를 일으킨 그는 자신의 도시 파리를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었다. 그 일을 맡은 사람이 바로 오스만 남작이었다.
1853년부터 1870년까지 파리의 얼굴을 통째로 바꿔 놓은 대규모 도시 정비사업이 이뤄졌다. 좁고 복잡하던 중세 골목은 넓은 대로로 바뀌었고, 오래된 건물들을 철거하고 ‘오스만 양식’으로 불리는 형태의 새로운 건물을 세웠다. 상하수도는 정비됐고, 공원과 숲은 도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파리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에 가까워졌다. 왜 이런 변화가 필요했을까? 그 답은 오스만 남작 이전의 파리, 그 복잡하고 답답했던 도시의 얼굴을 소설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중세 파리와 『삼총사』의 무대
오스만 남작이 허물어 버린 파리는 알렉상드르 뒤마가 작품 속에 생생하게 담아낸 바로 그 파리였다. 19세기 이전의 파리는 악취와 질병, 빈곤이 뒤엉킨 미로에 가까웠다. 수백 년간 중세의 도로망을 그대로 사용했고, 골목은 햇빛이 들지 않을 만큼 좁았다. 하수는 골목을 따라 흘렀고 비위생적인 도시 환경이 주기적으로 콜레라를 불렀다. 뒤마의 소설 속 삼총사가 활약을 펼치던 어둡고 격렬한 파리를 오스만 남작은 거침없이 헐었다.
뒤마는 이 작품을 신문에 연재했다. 소설 속 배경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파리의 거리였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파리에서 글을 쓴 뒤마는 오스만 남작이 그 골목들을 허물기 직전의 풍경을 소설에 새겨 넣었다. 마치 사라질 도시의 마지막 빛을 붙잡아 두려는 듯 그는 파리의 골목과 공기, 그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숨결까지 문장 안에 남겨 뒀다.
다르타냥의 하숙집과 세 총사의 거처가 모두 뤽상부르 공원 주변에 모여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뒤마는 의도적으로 총사들의 세계를 이 정원 주변에 묶어 『삼총사』 세계관의 정서적 중심지로 사용했다. 뤽상부르 공원은 다르타냥이 활약하던 시대 루이 13세의 섭정이자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가 조성을 명령했다. 공원 북쪽 끝에 자리한 뤽상부르 궁전은 프랑스혁명기에 감옥으로 쓰였고, 많은 혁명 인사가 이곳에 갇혔다가 단두대로 끌려갔다. 이후 궁 내부는 의회 건물로 바뀌었고, 나폴레옹의 원로원과 제2공화국의 원로원을 거쳐 오늘날에는 프랑스 제5공화국 상원의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뤽상부르 공원은 현재 23ha에 이르는 파리시내 두 번째 규모의 녹지다. 곳곳에 106개의 조각품이 흩어져 있고 녹색 금속의자에 앉은 사람들, 팔각형 분수대에 장난감 배를 띄우는 아이들, 체스판을 사이에 둔 노인들, 테니스를 치는 학생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파리의 진짜 매력은 하나의 시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이 한곳에 겹겹이 쌓여 있다는 데 있다. 중세의 골목과 혁명의 흔적, 제국의 야망과 오늘의 일상이 같은 도시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순교자의 언덕 위에 국가적 속죄의 의미로 세운 사크레쾨르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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