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키는 대로, 닿는 대로 - 경남 통영시 ‘숲 나들이’
한려수도가 빚은 바다 도시, 사람이 수놓은 알록달록 벽화, 케이블카와 루지…갖가지 매력 ‘이면’ 뜻밖의 발견
미륵산 중턱 가슴 가득 차오르는 편백향·바다를 품은 정원·열대식물의 싱그러움…알려지지 않은 길을 따라 색다른 항구를 만나다
경남 통영시는 오랫동안 ‘바다의 도시’로 불렸다. 한려수도가 빚어낸 잔잔한 물길부터 동피랑의 알록달록한 벽화, 케이블카와 루지 같은 액티비티까지.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려 봤을 통영의 전형적인 이미지다. 그러나 이 도시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면이 존재한다. 미륵산 자락에 뿌리내린 편백숲, 십수 년에 걸쳐 가꿔 온 민간정원, 국내에서 보기 드문 열대식물원까지. 봄볕이 따스해지는 4월을 지나 초여름을 향해 가는 5월, 남도의 초록은 어느 때보다 짙어진다. 이제 바다를 등지고 통영의 숲을 천천히 걸어 볼 때다. 맨발로 흙을 밟으며 피톤치드를 들이마시고, 바다를 곁에 둔 정원에서 수선화와 벚꽃을 만나는 산책에 나서자. 커피나무가 자라는 온실에서 이국적 풍광에 잠기는 경험 또한 빠뜨릴 수 없는 묘미다. 회와 굴, 멍게비빔밥만 떠올리던 항구가 낯선 얼굴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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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거니는 편백 오솔길, 나폴리농원
통영케이블카로 유명한 미륵산 중턱에는 알음알음 찾아오는 사람만 누리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안쪽 미래사 인근에 자리 잡은 나폴리농원이다. 2005년 문을 연 이래 자연치유를 테마로 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공간이다.
대표 프로그램은 ‘자기주도형 편백숲 맨발치유체험’이다. 농원 입구에서 우리를 맨 먼저 반기는 것은 특수 제작된 에어건으로 즐기는 피톤치드 에어샤워. 톡 쏘는 향이 코끝을 자극하며 은근히 몸이 깨끗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자리에 앉아 편백신선차 한 잔을 음미하며 농원 소개를 듣고 나면 본격적으로 오솔길로 나설 차례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흙길 위로 첫발을 내디뎌 보자. 길 위에는 효소를 첨가한 흙과 편백 톱밥이 부드럽게 깔렸다. 발바닥에 닿는 촉감이 폭신하면서도 청량하다. 청년기에 접어든 편백이 빼곡히 들어찬 숲은 그 어느 곳보다 왕성한 피톤치드를 뿜어낸다는 것이 농원 측의 설명. 한려해상에서 불어오는 음이온 가득한 해풍과 만나 이곳은 어디서도 누리기 힘든 청정한 공기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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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곳곳에는 다양한 즐길거리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피라미드 형태의 작은 건물 안에는 고농도 피톤치드가 채워져 있어 짧은 시간에도 집약적인 삼림욕이 가능하다. 청진기와 루페가 비치된 코너에서는 편백 줄기 속 수액의 흐름을 들어 보고 바위에 자란 이끼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냉족욕장이 등장한다.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봄철 살짝 오른 체온이 시원하게 가라앉는다. 볕 좋은 곳에 매달린 해먹에 누워 그물의 흔들림을 느껴 보고, 마무리로 아로마오일을 더한 온수족욕에 발을 넣으면 묵은 피로가 부드럽게 이완된다. 모든 프로그램은 100% 사전 예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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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한산도를 품은 미륵산 정상으로
맨발로 땅의 기운을 충분히 흡수했다면 이제 숲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할 차례. 나폴리농원 옆 미래사 주차장에서 미륵산(461m) 정상까지 등산로가 이어진다. 인파로 북적이는 케이블카 정규 코스를 벗어나 아는 이들만 은밀하게 걷는 고요한 루트다. 왕복 약 2㎞. 휴식을 포함해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히 다녀올 만하다.
미래사 입구의 작은 연못이 산행의 시작을 차분히 다독인다. 잔잔한 수면에 비치는 하늘과 숲, 멀리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가 마음을 가라앉힌다. 사찰을 지나 본격적으로 산길에 접어들면 키 큰 편백이 양옆에 늘어선다. 청량한 향과 부드러운 바람이 동행처럼 따라붙는 길. 처음 약 500m는 평탄한 흙길이지만, 이후 짧은 비탈과 계단이 등장한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덧 목조 데크가 시작되는데, 케이블카 상부 승강장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탐방로와 합류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신선대 전망대를 거쳐 올라선 꼭대기에 서면 사방의 시야가 활짝 트인다. 북쪽으로 통영항과 시가지, 동쪽으로 한산도, 남쪽으로는 한려해상의 크고 작은 섬이 점점이 떠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봄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 내음과 윤슬이 부서지는 푸른 물결은 케이블카로는 만나지 못했을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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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물빛소리정원
미륵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푸른 바다를 이제 땅 위에서 마주할 차례다. 통영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도산면 해안도로를 따라 차를 달리다 보면 수월리 언덕배기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물빛소리정원. 경상남도 제4호 민간정원으로 등록된 7000여 평(약 2만3140㎡) 규모의 숲정원으로 조경을 전공한 이충환 대표가 통영시청 재직 시절부터 15년간 주말마다 가꿔 온 결실이다.
‘물과 빛, 주인의 발걸음 소리’. 식물에게 꼭 필요한 3가지를 담아낸 이름이다.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아야 식물이 잘 자란다는 대표의 신념이 깃들어 있다. 정원은 삼면이 바다와 맞닿아 어느 길에서도 푸른 물길이 시야에 들어온다.
4월 초입이면 150여 그루의 벚나무와 매화, 목련, 황매화가 차례로 꽃망울을 열고 양지바른 자락에는 수선화 군락이 노랗게 번진다. 5월에는 작약과 붓꽃, 낮달맞이가 피어올라 다른 색감을 더한다. 봄이 깊어 5월 하순에 접어들면 풍경은 또 한 번 옷을 갈아입는다. 신록이 짙어지고 단아한 창포꽃이 꽃대를 올리는 무렵이면 이내 2000여 본의 수국이 푸른 바다와 호응하는 초여름 정원이 펼쳐진다.
곡선으로 휘어진 작은 오솔길은 방문객이 꽃과 가까이서 호흡할 수 있도록 의도된 동선이다. 동백꽃거리, 로즈마리길, 금목서길처럼 산책로마다 정성껏 이름이 붙어 있다. 한가운데 서 있는 팽나무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유명해진 나무와 같은 종으로, 덩굴이 휘감아 만든 독특한 형상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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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나무가 자라는 통영동백커피식물원
물빛소리정원이 탁 트인 바다와 호흡하는 야외무대라면 통영동백커피식물원은 거대한 유리온실 속 작은 열대우림에 가깝다.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열대·아열대식물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입장료에는 음료 한 잔이 포함돼 방문객은 식물로 뒤덮인 카페테리아에서 차 한 모금과 함께 푸른 잎사귀에 둘러싸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온실 안쪽에 마련된 다목적 힐링공간 ‘세라도’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처럼 꾸며져 종종 작은 공연과 전시무대로도 활용된다.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단연 커피나무다. 이곳에서는 실제 커피콩 수확을 목표로 나무를 키운다. 일반적으로는 수확 편의를 위해 2m 이내로 가지를 다듬지만, 이곳의 커피나무는 키가 3m를 훌쩍 넘긴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희소성이 높은 광경. 키 큰 줄기 사이로 난 관람로를 따라 거닐면 마치 동남아시아의 어느 농장에 들어선 듯한 착각마저 든다.
또 다른 명물은 바나나나무다. 오랜 연구 끝에 식용할 수 있는 열매를 맺도록 재배에 성공했고, 한 그루에서 20㎏이 넘는 바나나가 열린다. 식물원 측은 이 바나나나무를 방문객에게 분양하기도 하는데, 관리는 식물원이 담당하고 수확의 기쁨은 분양받은 가족이 함께 누리는 방식이다. 무늬동백, 파인애플, 파프리카까지 사계절 푸른 온실 풍경이 통영의 새로운 매력을 더한다.
초록이 깊어지는 통영의 봄
통영을 떠올릴 때 제일 먼저 그려지는 그림은 아마도 바다일 것이다. 그러나 이 도시의 봄에는 또 다른 빛깔이 함께한다. 미륵산 자락의 편백향, 바다를 끌어안은 정원에 피어난 봄꽃, 낯설고 이색적인 열대식물의 싱그러움.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통영의 새로운 결을 발견하게 된다.
여행이 늘 같은 자리에 머무를 필요는 없다. 익숙한 동피랑과 시장의 활기를 잠시 내려 두고, 알려지지 않은 길을 따라 한 걸음 더 들어가 본다. 맨발로 흙을 밟고, 정원의 꽃 이름을 하나씩 읽어 보고, 커피나무 그늘에서 차 한 잔을 음미하는 시간. 바다가 전부인 줄 알았던 통영의 진짜 초록은 이제부터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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