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뮤·클 이야기
백 투 더 스테이지 - 뮤지컬 ‘렘피카’
아르데코 미술 대표하는 실존 인물 ‘렘피카’의 파란만장한 생애
생존 위해 예술 선택한 그녀…방황하는 심리 곳곳서 아찔하게 교차
무대 전체 뒤덮는 거대한 회화 ‘아름다운 라파엘라’ 객석 압도
관객 오감 쉼 없이 자극하는 무대…생애만큼 뜨거운 여운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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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캔버스 앞에 홀로 앉은 노년의 타마라 드 렘피카가 관객의 시선을 진공청소기처럼 쭉쭉 빨아들인다. 197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공원의 벤치에 앉아 뭔가 그리고 있는, 한눈에도 성격 좋아 보이지 않는 노인. “역사는 지랄 맞지. 나도 그래”라며 툭 내뱉는 자조적인 독백이 ‘그럼 그렇지’ 하며 관객을 긴장하게 만든다.
이내 장면은 노년의 렘피카를 젊고 아름다웠던 러시아 시절로 순간이동시킨다. 그제야 관객들은 숨을 내쉬며 안도한다. 박혜나가 외치는 것 같다. “자, 이제 마음껏 극을 즐겨 주세요!”
뮤지컬 ‘렘피카’는 20세기 초 아르데코 미술을 대표하는 실존 인물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속도감 있게 펼쳐 놓은 작품이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이 터지자 러시아 명문 귀족 출신 변호사인 남편 타데우스가 투옥된다. 뇌물이 통하지 않자 렘피카는 혁명군에게 자기 몸을 담보로 남편을 빼내는 데 성공한다. 무기력한 남편, 어린 딸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탈출한 렘피카는 낯선 타국에서 어린 시절 자신을 사로잡았던 기억을 되살려 붓을 쥔다. 그는 삶을 위해 예술을 포기한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 예술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빼앗긴 귀족의 지위와 돈을 되찾으려 상류층에 접근해 초상화를 그리는 렘피카의 치열한 붓질 생활이 이어지고, 그는 파리 사교계와 예술계에서 이름을 얻기 시작한다.
성공을 향해 내달리던 렘피카는 수지 솔리도르의 클럽에서 자유로운 영혼 라파엘라를 만난다. 시대의 잣대에 얽매이지 않고 욕망에 솔직한 라파엘라에게 렘피카는 본능적으로 이끌린다. 그를 모델로 삼아 새로운 예술의 경지를 개척했던 과정은 렘피카의 실제 작품들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무능력한 남편 타데우스와 억눌렸던 열정을 깨우는 뮤즈 라파엘라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의 심리가 극 곳곳에서 아찔하게 교차한다.
무대는 대단히 현대적이면서도 아날로그의 매력을 풍긴다. 컴퓨터그래픽(CG)과 현란한 영상을 최소화하는 대신 철골구조물과 회화적 요소로 공간을 채웠다. 에펠탑을 닮은 거대한 구조물과 날카롭게 쏟아지는 조명. 객석에 앉아 있으면 마치 거대한 아르데코 미술작품 속에 잠겨 있는 착각이 든다. 무대 위 직선과 빛줄기들은 관객의 오감과 상상력을 쉼 없이 자극한다. 무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나 다름없다. 관객들은 그 맹렬한 미학 안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무대 양쪽 프레임에 렘피카의 실제 명화와 당시 영상을 띄운 연출도 세련됐다.
배우들의 기막힌 합은 이 무대의 색채와 빛을 완성한다. ‘렘피카’ 박혜나의 연기는 작품마다 변화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상향하고 있다. 그의 노래야 워낙 정평이 나 있는, 국내 대표적인 뮤지컬 디바 중 한 명이지만 이젠 연기로도 상단에 이름을 올려 둘 만하다. 늙고 꼬장꼬장한 노인부터 야심만만한 젊은 예술가까지 휙휙 오가며 객석의 호흡을 쥐락펴락한다.
‘라파엘라’ 역 린아와 박혜나가 맞붙는 이중창은 단언컨대 올해 본 최고의 듀엣이다. ‘하데스타운’에서 페르세포네를 연기한 경험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이 작품에 이르러 각자 자기 바지를 정확히 찾아 다리를 꿰어 입은 듯한 느낌이다.
렘피카는 딸 키제트를 그리면서도 자신을 엄마가 아니라 ‘셰리’라고 부르게 할 만큼 평범한 궤도를 벗어난 사람이다. 이 작품은 렘피카라는 실존 인물을 포장하거나 변명해 주지 않는다. 그저 파멸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모순적인 뒷모습을 날것 그대로 꺼내 놓을 뿐이다. 매끈한 영웅담이 아니라 욕망에 솔직했던 한 인간의 지독할 정도로 세밀한 초상화다. 위악적이라고 할 만큼 솔직한 묘사가 작품에 묘한 설득력을 불어넣는다.
미래주의 예술가 ‘마리네티’를 연기한 조형균은 어떤 작품, 어떤 캐릭터든 제 몫 이상을 해내는 배우다. 그가 대표적인 다작 배우 중 한 명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독설과 유머를 절묘하게 섞어 가며 렘피카와 예술적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다. 타데우스 역 김민철 역시 번쩍 정신이 들 정도로 뛰어난 노래를 들려줬다.
파리 밤문화의 상징 ‘수지 솔리도르’ 역으로 분한 김혜미의 오버 연기도 일리가 있다. 위엄과 품위를 지닌 ‘남작 부인’ 김현숙은 오랜만에 무대에서 만났다.
클래식 선율에 팝과 록, R&B가 섞인 맷 굴드의 음악은 아르데코적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작품에 접착제처럼 단단히 들러붙어 있다. 주인공의 마음을 담은 ‘우먼 이즈(Woman Is)’, 라파엘라의 에너지가 터지는 ‘돈 뱃 유어 하트(Don’t Bet Your Heart)’, 마리네티의 신념이 담긴 ‘퍼펙션(Perfection)’ 등 주요 넘버들이 귀에 오래 남는다.
1막의 마지막 넘버가 끝나고 무대 전체를 뒤덮으며 거대한 회화작품 ‘아름다운 라파엘라’가 내려온다. 단숨에 객석을 압도하는 순간이다. 복잡하게 머리 굴릴 필요 없다. 그저 눈앞에 쏟아지는 시청각적 쾌감에 흠뻑 취하면 그만이다.
레이첼 채브킨 연출과 칼슨 크라이저 작가가 만든 이 작품은 미국 브로드웨이를 거쳐 아시아 최초로 한국 무대에 안착했다. 리뷰 세 편쯤은 너끈히 말아 낼 수 있을 만큼 꽉 찬 만족감을 주는 공연이었다.
“세상을 바꿀 순 없다. 바꿀 수 있는 건 이 네모난 캔버스 하나뿐이다.”
그렇게 붓을 쥔 한 여성의 선언이 관객 각자의 깊은 어딘가로 스며든다. 렘피카는 자신의 삶을 캔버스 위 물감처럼 통째로 짜냈다. 그리고 스스로 한 폭의 그림이 돼 누구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마지막 순간. 수많은 그림 아래서 그의 붓질은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캔버스 위에 기어코 자신을 증명해 낸 그 뜨거운 생애는 오는 6월 21일까지 서울 코엑스아티움 우리은행홀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놀유니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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