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은 오랫동안 복개천이었다. 20년 전 복개천 위에 세워진 다리가 철거되고 덮개가 걷어지면서 원형이 회복돼 수변공원이 됐다. 지금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청계천이지만, 예전엔 사람들이 이곳을 다른 목적으로 찾았다. 청계천 주변에는 조그마한 공장과 공장에 필요한 재료상이 많았는데, 미술에 필요한 재료상 또한 꽤 있었다. 미술인도 청계천을 열심히 찾아왔다.
미술에는 재료와 제품이 있다. 신한, 알파, 골든처럼 상품명이 붙은 건 제품이다. 피그먼트, 린시드, 테레핀 등은 재료에 해당한다. 재료를 가공하고 조합하면 제품이 만들어진다. 예전에는 따로 미술 제품이 없었다. 화가들은 화학자처럼 재료를 잘 가공하고 조합해 자신에게 필요한 물감을 만들어 냈다. 그때는 재료학이 필수였다. 요즘 화가들은 재료학을 잘 모른다. 인상파가 시작될 무렵 미술 재료들은 들고 다닐 수 있는 튜브 속 제품으로 만들어져 야외작업을 가능하게 했다. 지금은 튜브나 깡통에 담긴 유명 제품들이 세계 어디로든 유통된다. 재료학을 몰라도 그림을 그리는 데 아무런 애로사항이 없다.
그러나 캔버스 위 자신만의 개성적인 색상과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화가들은 제품과 재료, 이 둘을 다 알아야 한다. 재료까지 잘 아는 화가는 제품만 아는 화가보다 경쟁력이 더 뛰어날 수밖에 없다. 화가들이 여전히 재료상을 찾는 이유다.
많은 미술인이 청계천과 을지로를 찾는다. 을지로에는 전통적인 미술 재료를 파는 재료상이 많았다. 프랑스 파리나 미국 뉴욕에서 사면 비싼 값을 치러야 할 미술 재료가 이곳에선 공업 재료로 분류돼 싼 가격으로 팔리기도 했다. 을지로에는 절삭과 용접을 하는 데가 많아 조각가들이 즐겨 찾았다. 기술적 어려움이 있는 조각작품을 대행해 주는 소규모 가공공장도 있었다. 선반을 돌리거나 철판을 두드리는 근육질의 직공들 사이로 예쁘장하게 보이는 미대 여학생들이 아슬아슬하게 지나다녔다.
현대미술의 하나인 테크놀로지 아트를 하는 미술인은 청계천을 찾는다. 이곳에는 전기·전자 제품과 부품이 많다. 미술인이 원하는 작품을 위한 특별한 회로도에 따라 납땜을 하며 부품을 연결하면 테크놀로지 아트에 적합한 기기가 뚝딱 만들어진다. 유럽에서 PAL 방식으로 제작된 백남준의 비디오작품을 한국에서 사용하는 NTSC 방식으로 바꾼 것도 1980년대의 청계천이었다. 미국이나 유럽 같으면 몇 달이 걸릴 일을 단 하루 만에 해치우는 기술자들이 청계천에는 적지 않다. 청계천을 찾은 외국 현대미술가들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아트는 테크네에서 온 말이다. 미술은 원래 인공(아트피셜)이고 또 기술이었다. 아트와 테크네는 한동안 뜻이 따로 분리돼 사용됐다. 아트는 미술을 의미하고 테크네는 기술을 이르게 됐다. 분리됐던 아트와 테크놀로지는 청계천에서 다시 합쳐져 공생하고 있었다. 최근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는 재개발 중이다. 큰 건물이 들어서자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의 선반기술자·용접기술자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인공의 상징이던 청계천 일대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다. 주인은 물길을 따라 번성하고 있는 자연이다. 물새가 날아들고 한때 멸종위기에 몰렸던 민물고기들이 청계천의 물길을 거슬러 광화문까지 몰려오고 있다. 청계천은 조선시대에 만든 인공하천이다. 인공의 반대말은 자연이다. 청계천은 먼 옛날 자연이었을 게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인공의 상징이 됐다. 지금은 다시 인공과 동거하는 자연으로 변모 중이다. 참으로 재미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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