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t We Forget (잊지 않겠습니다)

입력 2026. 04. 28   15:09
업데이트 2026. 04. 2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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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관 전 호주에서 1년을 보냈다. 귀여운 동물 ‘쿼카’로 알려진 서호주 퍼스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중 가장 오래 깊이 남은 장면은 화려한 도시의 박물관이나 랜드마크가 아니라 이름도 낯선 작은 마을 한복판에서 마주한 풍경이었다.

인구가 몇천 명 남짓한 소도시마다 광장이나 공원 한쪽에는 어김없이 전쟁기념비가 서 있었다. 비석에는 그 마을 출신으로 제1·2차 세계대전, 6·25전쟁 등에 참전해 전사한 청년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한두 명 남짓, 또 어떤 마을에서는 수십 명의 이름이 차갑고 단단한 돌 위에 남겨져 있었다. 그 낯선 이름을 하나하나 읽으며 한동안 발길을 멈추곤 했다. 그 아래는 한결같이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Lest We Forget.”

‘잊지 않도록’ 혹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직역하면 그렇지만, 그 말이 품은 무게는 훨씬 깊고 묵직하게 가슴에 남았다. 기념비 앞에는 누군가 정성스레 놓아 둔 꽃이 시들지 않게 관리되고 있었고, 주변 잔디는 늘 단정하게 손질돼 있었다. 크고 웅장한 기념관이 아니었다. 특별한 국가 행사가 있는 날도 아니었다. 그저 그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꾸준히 함께 잊지 않기로 마음먹은 결과였다. 그 단순하고도 지속적인 행위가 오히려 어떤 거창한 행사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줬다.

한참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저 이름의 주인공들은 어쩌면 꿈 많던 스무 살 청년이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음식이 있었고,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으며, 언젠가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었을 터. 그런 그들이 고향을 떠나 낯설고 두려운 전장으로 향했고,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이 바랐던 것은 훗날의 영웅 대접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저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 마을과 사람들, 평범한 일상이 지켜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간절한 바람은 뒤에 남은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있다. 6·25전쟁에서 산화한 수많은 선배 전우,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다가 유명을 달리한 동료들이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 먼저 이 자리를 온몸으로 지켜 줬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일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선다.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자 나 또한 누군가에게 기억될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이어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한 가지 공통된 방법을 이어 왔다. 바로 ‘잠시 멈추는 것’이다. 기도이든, 묵상이든, 묵념이든 형식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소음을 잠시 내려놓고 바쁜 일과 속에서 잠깐 눈을 감으며, 나보다 먼저 이 자리를 지킨 사람들을 마음에 떠올리는 것이다. 그것이 기억을 살아 있게 하는 가장 오래되고도 보편적인 방법이다. 오늘 하루 단 1분이라도 그렇게 멈춰 보는 건 어떨까.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좋다. 초병 근무를 서는 자리에서, 일과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이라도 충분하다.

역사도, 기억도 저절로 이어지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반복적으로 함께 되새길 때 비로소 살아남는다. 오늘 우리 장병들이 묵묵히 완수하는 하루하루의 임무 역시 누군가의 삶을 지키는 또 하나의 ‘기억’으로 쌓여 갈 것이다. 그 작은 멈춤이 오늘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고,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선명하게 비춰 줄 것이다.

김민성 대위 공군1전투비행단 목사
김민성 대위 공군1전투비행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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