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
울산 서생포왜성, 왜란의 기억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
2·3중 해자 두르며 장기전에 대비
강·동해 접해 물자·인력 수송 용이
사명대사 네 차례 걸쳐 강화 회담
왜군 철수 후 경상좌수영이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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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리에 있는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1562~1611)가 지은 일본성이다. 죽도왜성과 부산왜성, 울산왜성과 봉화로 연락한 까닭에 ‘봉화왜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도산성, 증성, 학성 등의 이름도 있었다(『국가유산청 포털』).
1592년 5월 23일 20만 왜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1년 후부터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명나라의 지원과 조선 의병의 반격, 충무공 이순신의 활약 등 군사적 요인 외에도 대기근에 따른 군량미 부족과 전염병이 왜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명과 왜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자 가토 기요마사는 전군을 남하해 남해 바닷가에 성을 쌓고 화의를 기다렸다(『축성 주인장(朱印狀)』).
가토는 경상 좌수영 소속 서생포 수군 만호진을 함락시킨 후 성을 쌓았다. 돌은 이곳과 인근 숙마성에서 조달했다. 서생포왜성은 규모가 컸다. 1872년 제작된 『울산서생진지도(蔚山西生鎭地圖)』에는 성 내부의 건물들과 주변 마을, 시장이 그려져 있고, 전함과 수군도 묘사돼 있다. 장기전에 대비한 모습이 역력했다. 성내에는 히데요시의 어전도 마련돼 있었다(『분충서난록』). 입지상 평지지만 끊어진 산을 연결해 성을 쌓은 산성(山城)에 해당한다(『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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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동서 870m, 남북 370m 정도의 규모다. 성벽 밖에는 2·3중으로 해자를 둘렀다. 해발 133m 높이에 쌓은 성곽은 동서 장방형의 성벽을 두르고 있으며 내부에는 천수각(天守閣)이 있었다. 천수각은 남북 18m, 동서 17m, 높이 5m 정도의 규모였다. 3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천수각으로 통하는 돌계단은 아직도 남아 있다. 성곽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있는 천수각은 평소에는 왜장 거처로 쓰였고, 전쟁 때는 전투 지휘소였다(『왜성 1』). 이러한 일본식 성곽은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의 성곽 축조에 잠시 응용되기도 했다(『국가유산청 포털』). 구보는 남한산성과 화성 등에서 보이는 수어장대(守禦將臺)가 유사한 기능이라 천수각의 변신 아닌가 여긴다.
이곳은 회야강과 동해를 접하고 있어 물자와 인력의 수송이 용이해 왜군의 중요 거점으로 사용됐다. 북쪽의 울산왜성과 남쪽의 임랑포왜성, 기장왜성, 동래왜성과 더불어 부산왜성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가토 기요마사군은 1596년 일본으로 되돌아갔다가 이듬해 정유재란 때 다시 건너와 주둔했다. 가토의 부장 아사노 요시나가가 이곳을 수비하면서 성곽 둘레를 줄였다(『왜성1』). 구보는 일본 구마모토 여행 때 성 아래 트램역 이름이 ‘울산 마치(蔚山町)’인 것을 보고 서생포 왜성 축성에 동원됐던 울산 주민들이 전쟁 후 일본으로 끌려가 구마모토성 건설에도 투입된 것 아닐까 여겼던 기억을 떠올린다.
아파트 이름과 간장 상표에도 ‘울산’이 남아 있었다. 실제로 가토는 퇴각할 때 축성 기술자와 기와·도자기·제지 장인 400여 명을 데려갔다. 가토는 구마모토성을 단단하게 지은 후 방 된장에 졸여 말린 토란 줄기를 다다미 속에 채워 넣어 유사시 비상식량으로 삼았다. 구보는 서생포왜성에서 군량미가 떨어져 아사할 뻔했던 가토의 트라우마가 작용한 까닭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정유재란 때는 이곳에서 두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 1597년 12월 22일 명나라의 양호·마귀가 보병과 기병 5만여 명으로 공격했으나 패퇴했다(『갈암집』). 1598년 1월에는 조·명 연합군이 포위했으나 왜군 원군 2만여 명이 집결하면서 무위에 그쳤다. 구보는 이 성이 공략하기에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한다. 이는 경상좌병사 곽재우가 “성이 비할 데 없이 견고해 정병 2000명이면 충분히 지킬 수 있다.(『선조실록』, 32년 12월 13일)”고 평한 데서도 확인된다. 풍산 만호 유응수는 1597년 도산성 공격을 펼치다가 순사했다(『순조실록』, 25년 12월 16일). 아군은 전면전보다 게릴라전으로 선회했다. 대구 중영장 권응수가 투항한 왜병들을 데리고 밤이면 성 밖에 잠복해 있다가 물 길러 나오는 왜병들을 꾀어 투항하게 하기도 했다( 『선조실록』, 31년 4월 29일). 1598년 11월 왜군이 철수한 후엔 명나라의 마귀 제독이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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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은 1599년 성내에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53명의 충신 애국지사의 위패를 모신 창표당이 세워졌다는 기록을 좇아 발굴된 초석과 기단을 바탕으로 창표사를 복원했다(『서생포왜성 성벽 보수구간 내 문화재 표본조사 결과보고서』). 성 밖 동제당에는 마귀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마을이 주관해 제사를 지내왔으며, 동문 바깥에는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군 편갈송의 공적을 기리는 절강 편씨(浙江片氏) 후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서생포왜성은 사명대사가 1594년에 세 차례, 1597년에 한 차례 등 네 차례에 걸쳐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 회담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명대사가 쓴 『분충서난록』 속 ‘청정영중탐정기(淸正營中探情記)’에는 당시 화친의 전제 등이 기록돼 있다. 사명대사는 조선인 포로 석방 담판을 위한 조건들을 가토와 의논했다. 가토가 “조선 8도 중 남쪽 4도를 일본에 할양하고, 왕자 1명을 일본에 인질로 보내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를 전하자 사명대사는 시 한 수로 답했다. “옳은 일이 아니면 이로움을 찾지 말라. 밝은 곳에는 해와 달이 있고 어두운 곳에는 귀신이 있으니 진실로 내 것이 아니라면 비록 털 한 올이라도 탐내지 말라.”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내전에서 승리한 뒤 군벌들의 군사력을 외부로 방출시키려 조선을 침략한 6년여간의 소모전이었다. 히데요시는 전쟁 기간 중 사망해 약탈과 납치 외에는 얻은 게 없었다. 일본의 계산은 수도를 함락하면 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주민은 항복함으로써 전쟁이 종식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 왕은 달아나고 백성은 의병을 일으켜 저항했다. 왜로서는 큰 차질이었다. 왜성은 계획에 없던 장기전에 돌입하려 지은 것들이었다. 전쟁으로 조선은 나라가 부서졌고, 명나라는 조선을 돕느라 국력 손실이 컸다. 만주의 여진족만이 어부지리로 세를 불린 후 명(明)을 뒤엎고, 청(淸)을 세웠다. 조선은 그때껏 조공을 받아오다 거꾸로 청 휘하에 복속됐다. 임진왜란의 승리자는 여진족인 셈이다.
서생포왜성은 일본군이 물러간 뒤 경상 좌수영 소속으로 사용됐다. 4월 벚꽃마저 흐드러지게 피어 구보의 눈에 서생포는 규슈의 어느 공간을 연상시킨다. 지도자의 농간으로 치러졌던 전쟁의 역사는 잊힌 채 벚꽃 사진 명소로만 남았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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