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병들의 독서의 닻, 문화공간 정박하다

입력 2026. 04. 22   17:19
업데이트 2026. 04. 22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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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1함대 수병들이 직접 만들어 가는 ‘바른도서관’

최근 독서를 하나의 힙한 라이프스타일로 소비하는 ‘텍스트힙(Text-hip)’이 MZ세대를 대표하는 트렌드로 떠올랐다. 장병들의 휴식과 자기계발을 위한 취미가 다양해진 가운데 병영도서관도 과거의 정적인 공간을 넘어 능동적인 문화 플랫폼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23일 ‘세계 책의 날(World Book and Copyright Day)’을 맞아 해군1함대 수병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소개한다. 글=조수연/사진=한재호 기자

해군1함대 병영도서관은 수병들이 주도적으로 문화를 생산하고 교류하는 복합문화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병영도서관에 모인 수병들. 왼쪽부터 탁동하 일병, 이수환 병장, 박성연 상병, 안현준 병장, 정문기 병장, 이민우 일병.
해군1함대 병영도서관은 수병들이 주도적으로 문화를 생산하고 교류하는 복합문화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병영도서관에 모인 수병들. 왼쪽부터 탁동하 일병, 이수환 병장, 박성연 상병, 안현준 병장, 정문기 병장, 이민우 일병.


책크인, ‘책을 통해 크는 사람들’ 작은 책임감에서 피어난 7인의 연대 

디지털 콘텐츠의 자극적인 파도 속에서 활자가 주는 잔잔한 위로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듯한 현실 속에서 1함대 정훈실은 책의 날이 지닌 ‘일상 속 독서문화 확산’이란 가치를 병영 실정에 맞게 재해석했다. 수병들이 직접 참여하고 가꿔나가는 자발적 운영위원회 ‘책크인’을 결성한 것이다.

수병 중심의 병영도서관 운영위원회인 ‘책크인’은 거창한 프로젝트나 상급 부대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독서는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의 필요로 시작돼야 한다’는 수병들의 가치관이 반영됐다.

위원회 이름인 ‘책크인’은 ‘책을 통해 크는 사람들(책+크다+人)’이라는 깊은 의미와 함께 도서관이라는 공간으로 기분 좋게 ‘체크인(Check-in)’ 하자는 중의적 목표를 담아 수병들이 직접 명명했다.

이 자발적인 모임의 시작점에는 정훈실 박성연 상병이 있다. 지난해 9월 전입해 도서관 관리 업무를 맡은 박 상병은 스스로를 ‘책과 담을 쌓았던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공용 공간을 관리한다는 사명감은 매일 일과 후 그를 도서관으로 이끌었다.

묵묵히 책을 정리하던 어느 날, 그는 늘 그곳에서 책을 읽고 정리하던 1기지지원대대 정문기 병장과 마주쳤다. 주인의식을 갖고 공간을 돌보던 정 병장은 박 상병에게 함께 ‘도서관을 가꿔보자’고 제안했고, 이것이 ‘책크인’의 첫걸음이 됐다.

이후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수병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기계발서에 흥미를 느껴 수병들의 취향 교집합을 분석하고 신규 도서 기획에 아이디어를 낸 작전참모실 이수환 병장, 당직 근무 중 정훈실장과 도서관 개선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다 민간 독립서점의 경험을 살려 위원회에 합류한 공병대대 이민우 일병이 차례로 뜻을 모았다.

여기에 정훈실 소속으로 관리를 돕던 안현준 병장과 휴식처로 도서관을 찾다가 참여를 권유받은 박성준 병장 등 총 7명의 수병이 모여 완벽한 하나의 팀을 이뤘다. 이용자였던 이들이 운영자로 바뀌는 순간, 병영도서관은 수병 맞춤형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북 큐레이션, 취향과 테마를 그대에게…전우 추천도서로 지적 호기심 자극 

‘책크인’ 활동의 핵심은 병영도서관을 어떻게 하면 더 오고 싶은, 그리고 재미있는 공간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에 있다. 이들은 수천 권의 책을 단순 진열하는 게 아니라 독자에게 취향과 테마를 제시하는 ‘북 큐레이션(Book Curation)’을 병영에 도입했다.

‘모든 책을 다 갖출 수 없다면 관심 없던 사람도 끌릴 수 있는 매력적인 테마를 제시해야 한다’는 이민우 일병의 제안에 따라 위원회는 수병들에게 친숙한 팝 컬처 콘텐츠를 전면에 내세웠다. 영화나 드라마의 원작 도서, 최근 청년층에게 인기 있는 웹소설 기반 작품 등 맞춤형 테마 전시를 기획했다.

여기에 수병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참여형 독서 콘텐츠를 더했다. 마치 포천쿠키를 열어보듯 캡슐을 뽑아 도서를 추천받는 ‘오늘의 추첨도서’ 코너를 신설해 독서를 하나의 놀이로 승화했다.

또 ‘책크인 위원 추천도서’ 옆에는 ‘읽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문장이 있는 책’ 등 수병들이 직접 작성한 감성적인 코멘트 카드를 비치해 전우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러한 큐레이션 방식은 수병들의 심리적 진입 장벽을 크게 낮췄고, 부담 없이 책을 집어 드는 인원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성과로 이어졌다.


 


양심도서관, 흑백요리사부터 밈까지…MZ세대 언어로 ‘독서 장려·훼손 방지 캠페인’ 소통 

1함대 병영도서관의 또 다른 성공 비결은 철저하게 MZ세대 수병들의 눈높이와 언어에 맞춘 소통 방식에 있다. 위원회는 도서관을 수병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양심도서관 캠페인’을 전개했다.

학창 시절부터 지겹도록 봐온 ‘책을 읽자’ ‘정숙’ 같은 딱딱하고 훈계조의 문구를 과감히 배제했다. 대신 한때 소셜 미디어를 강타했던 ‘No Roots’ 밈, 방송인 김동현의 ‘운동 많이 된다’ 밈, 나아가 최근 큰 화제를 모은 예능 ‘흑백요리사’의 패러디까지 적극 활용해 트렌디한 포스터를 제작했다.

익숙하고 유머러스한 인터넷 문화가 결합된 포스터는 병영 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수병들은 거부감 없이 포스터 내용을 수용했고, 이는 곧 자발적인 도서 훼손 및 분실 방지와 도서관 이용 수칙 준수로 이어졌다. 도서관이 누군가에게 통제받는 관리 대상이 아니라 전우들과 함께 누리고 지켜야 할 공동의 자산으로 인식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문화산실, 장병들 주도적으로 꾸린 복합문화공간 성공사례…지속 가능한 병영문화 청사진 

부대는 이번 사례가 통제와 규율이 중심이 되는 군 조직에서 병사들이 스스로 권한을 위임받아 자율적으로 문화를 형성해 나가는 ‘보텀업’ 방식의 훌륭한 성공 사례라고 자평한다.

‘책크인’ 운영을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김윤영(소령) 정훈실장은 “도서관이 단순히 활자를 소비하는 공간을 넘어 수병들이 주도적으로 문화를 생산하고 교류하는 복합문화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며 “책의 날의 참된 취지에 맞게 앞으로도 독서문화 확산과 병영문화 개선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현재 1함대 정훈실은 ‘책크인’ 위원들과 함께 밈을 활용한 캠페인 고도화, 다채로운 추천 도서 프로그램 기획, 외부 전문가 연계 교육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나아가 현재의 성공적인 도서관 운영 성과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체계적인 운영 수칙을 정립해 예하 부대 병영도서관까지 이 모델을 확대 적용할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있다. 스마트폰의 일회성 자극 대신 종이책의 질감을 선택하는 수병들이 늘어나는 곳. 1함대 병영도서관이 쏘아 올린 작은 기적이 대한민국 장병들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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