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성의 메아리 속에서 찾은 생명의 언어

입력 2026. 04. 22   16:51
업데이트 2026. 04. 22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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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말』을 읽고 


정현욱 상병 육군3보병사단 포병여단 선승포병대대
정현욱 상병 육군3보병사단 포병여단 선승포병대대

 

이어령 지음 / 세계사 펴냄
이어령 지음 / 세계사 펴냄



육군3보병사단의 겨울은 매섭다. 현재 복무 중인 선승포병대대는 막강한 화력으로 적을 압도하는 곳이지만, 그 이면에는 전우들의 생명을 돌보는 의무병의 임무가 있다.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를 꿈꾸는 내게 군 생활은 인간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 수련의 장이다. 훈련장 포성이 긴장을 고조시킬 때 고(故) 이어령 선생의 유작 『이어령의 말』을 집어 들었다. 거인이 남긴 마지막 언어들이 전방의 살벌한 공기를 어떻게 치유의 언어로 바꿀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포병여단은 ‘화력’과 ‘타격’이라는 단어에 익숙하다. 우리는 적의 좌표를 계산하고 효율적인 타격을 고민한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은 이 책에서 ‘말’이야말로 인간을 구분 짓는 가장 고귀한 도구이며, 죽어 가는 것들을 살려 내는 생명의 힘이라고 역설한다. “말은 탄환이 아니라 씨앗이어야 한다”는 문장을 읽으며 의무병의 본분을 되새겼다. 포탄이 적을 저지하는 물리적 방벽이라면 의무병이 전우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심리적 방벽이다. 선생이 남긴 지혜의 말들은 탄약고의 포탄보다 더 강력한 정신적 무기로 다가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공황장애를 앓던 동기였다. 그는 갑작스러운 스트레스가 덮쳐 올 때면 과호흡과 심장 통증을 호소하곤 했다. 그때 줄 수 있는 처방은 약물 이전에 흔들리는 그를 붙잡아 줄 ‘말’이었다. 선생은 “사람은 자기 말을 들어주는 이가 한 명이라도 있을 때 살 수 있다”고 했다. 화려한 이론 대신 그의 곁을 지키며 담백하게 말을 건넸다. “나의 눈을 봐. 내 호흡에 맞춰 천천히 숨을 쉬어 보자. 옆에 있을게.”

발작의 순간 동기에게 필요했던 것은 고통을 함께 견뎌 준다는 확신의 말이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훈련 중에도 안색을 살피며 보살핀 결과 이제 그는 밝은 모습으로 군 생활에 적응 중이다.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말 한마디가 모여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거대한 자산이 되는 과정, 이것이 바로 선생이 말한 ‘생명 자본’의 실천이었다.

철원평야의 칼바람 속에서 우리는 종종 거대한 군대 조직의 부품처럼 느껴지곤 한다. 이어령 선생은 마지막까지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며,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창조한 언어’를 꼽았다. 예비의사로서 단순히 질병을 진단하는 기계가 되길 거부한다. 선생의 통찰처럼 인간을 면밀히 관찰하고 맥락을 읽어 낼 때 진정한 치유가 시작된다. 전우들의 고충을 단순히 ‘부적응’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 뒤의 외로움을 읽어 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성적 의무병’의 자세다.

포성 속에서도 전우들의 신음 소리를 놓치지 않는 의무병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선생이 남긴 말의 씨앗을 가슴속에 심어 생명 존중의 가치가 꽃피게 할 것이다. 훗날 정신과 의사가 됐을 때 철원에서 동기의 손을 잡고 건넸던 나의 ‘말’을 결코 잊지 않겠다. 가장 험한 곳에서 따뜻한 치유를 전하는 부대의 파수꾼이 될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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