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카이로 ‘살라딘 요새’-기독교 세력에 대항한 이슬람의 방어 거점
지난 2월 28일, 미국·이스라엘 군대가 이란을 공격했다. 전격 공습으로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를 비롯한 국가 지도부 인사들이 일거에 사망했다.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로 대변되는 군 수뇌부도 비슷한 신세가 됐다. 복잡하게 얽힌 다양한 요인이 전쟁을 추동했지만, 특히 종교적 측면에서 900여 년 전 중세 십자군전쟁에서 불붙은 기독교와 이슬람, 두 문명권의 갈등과 충돌이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원고에서는 중세 십자군 전쟁 시 기독교 진영 기사단 활동에 대해 고찰했다. 이번에는 “그렇다면 당시 이슬람 세계는 어떻게 대응했을까?”라는 궁금증을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살라딘 요새(Citadel of Saladin· 카이로 성채·197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카이로 역사지구 위치)를 통해 풀어보려 한다.
카이로의 모카탐 언덕 위에는 도시 전체 경관을 주도하는 거대한 석조 성채가 버티고 있다. 흔히 ‘살라딘 요새’라고 불리는 이곳은 지난 역사 속에서 단순한 군사시설로 머물지 않았다. 한 시대의 불안과 공포, 한 인물의 전략적 상상력 등을 엿보게 하는 소중한 유산이었다. 그 이유를 알려면 먼저 성채 자체보다도 그것이 세워진 시대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살라딘 요새는 돌로 쌓은 성벽이기 이전에 중세 십자군 전쟁이라는 장기전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12세기 동안 중동지역은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 간 충돌이 상존(常存)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현재 팔레스타인지역에는 예루살렘 왕국과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작령 등 서유럽 계통의 십자군 국가들이 세워졌다. 각각 단순한 점령지를 넘어 장기적인 정치·군사적 거점이었다. 해안의 항구와 내륙의 성채를 연결한 이들의 존재는 동지중해의 전략적 질서마저 변경시켰다. 그 결과 이슬람 세계는 일시적 충돌이 아니라 1세기 이상 이어진 전쟁 상황에 직면해야만 했다.
이러한 주변 정세는 특히 이집트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는 풍부한 농업 생산력과 세수(稅收), 그리고 나일강을 젖줄로 한 보급창고와 같은 곳이었다. 따라서 이집트를 장악하는 자는 단순히 한 나라가 아니라 장기전에서 소중한 후방기지를 확보하는 셈이었다. 실제로 12세기 중반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은 수차례 이집트를 넘보면서 내부 혼란을 이용해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 이 시기에 이집트는 안전한 후방지대가 아니라 십자군이 호시탐탐 노린 중요한 전략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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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살라딘(Saladin)이었다. 오늘날 그는 흔히 십자군에 맞서 예루살렘을 탈환한 영웅으로 기억되지만, 역사상 그를 위대하게 만든 업적은 이집트를 전쟁 수행 가능한 국가로 재조직한 데 있었다. 원래 그는 시리아의 누르 앗딘 체제 아래서 경력을 쌓은 군인이었다. 예기치 않게 숙부와 함께 이집트 문제에 관여하면서 중앙정치에 깊숙이 뛰어들게 됐다. 1169년 이집트 파티마왕조의 재상직에 올랐으나 1171년에는 칼리프를 대신해 직접 권력을 장악했다.
이것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파티마 왕조 말기의 이집트는 궁정 내분과 권력 투쟁이 다반사였기에 십자군 외압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살라딘은 이집트를 장기전 수행이 가능한 체제로 탈바꿈시켜야만 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살라딘 요새가 탄생했다. 이는 적군이 침입했을 때 잠시 도피하기 위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중세에 성채는 단순한 방어시설이 아니라 지휘소이자 행정 중심지, 그리고 병참 기지였다. 궁정 중심의 폐쇄적 도시인 카이로를 하나의 전략 공간으로 재편할 필요성을 느끼던 차에 살라딘은 핵심 과업으로 모카탐 언덕 정상에 성채 건설을 결심했다.
대략 1176년부터 구체적인 축성 작업에 돌입했다. 살라딘의 측근이자 행정·군사 책임자였던 카라쿠시가 공사 전반을 감독했다. 하지만 이 요새는 한 번에 완성된 기념비가 아니었다. 통치 중심지로서 완벽한 형태를 갖춘 것은 후대 알 카밀 시기였다. 이후에도 맘루크와 오스만 시대를 거치며 줄곧 증축 및 보강이 이뤄졌다. 현존하는 요새는 살라딘 개인의 단일 작품이라기보다는 십자군 시대 이후 이집트가 축적한 군사 건축 기술의 총체라고 볼 수 있다.
요새의 출발점은 외곽 성벽이었다. 성채가 자리한 고지대는 대략 남북 650~700m, 동서 300~400m 정도의 땅이었다. 이곳을 높이 약 10~14m, 두께 2.5~3.5m의 성벽으로 감쌌다. 성벽 상부에는 방어용 보행로와 흉벽이 설치돼 수비병이 효과적으로 근접 방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탑들은 성벽 전체를 살아 움직이는 방벽으로 만들었다. 특히 동·북벽이 만나는 지점에 반원형 형태로 나란히 선 부르즈 알 람라와 부르즈 알 하다드, 2개의 대형탑은 그 높이와 지름이 무려 20여m에 달했다. 이는 단순한 망루가 아니라 성벽 취약지점을 보완하고 측면 화력을 집중시키는 소형 독립요새나 진배없었다. 성문 역시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었다. ‘계단식 성문’에다 굴절 형태로 적의 돌입을 최대한 곤란하게 만드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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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살라딘 요새의 진정한 위력은 그 생존성에 있었다. 바로 살라딘의 이름에서 빌려 왔다는 ‘유수프의 우물’을 말한다. 두 개의 수직축과 나선형 경사 통로로 이뤄진 우물은 85~90m에 이를 정도로 깊었다. 게다가 사람이 아니라 소나 노새 같은 가축이 회전 장치를 끌며 오르내릴 수 있도록 최대 2.5m의 폭을 자랑했다. 이는 단순한 급수시설이 아니라 장기 포위전에서 성채가 버틸 수 있도록 만든 전략적 생존 장치였다. 성벽이 적의 외부 접근을 막는 장치였다면 이 우물은 성채 함락을 방지한 비밀무기였다. 이외에 성채 내부에는 병영, 무기고, 식량 저장고, 행정 및 예배 공간, 그리고 왕실 거주 구역이 있었다. 현존하는 건물 상당수는 후대의 것이지만 전시(戰時) 축소판 수도라는 공간 배치의 기본 원리는 이미 살라딘 시기에 정해졌다.
한편 살라딘 요새의 전쟁사적 의미는 1187년 이슬람 세력에 의한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중요한 사건과 맞물려 있다. 이때 유대 땅 갈릴리 전장에서 싸운 이슬람 군대의 버팀목은 바로 이집트라는 안정된 후방이었다. 장기전을 감당하려면 인적 및 물적 자원 공급이 중단되지 않아야 했다. 전쟁은 영웅의 칼끝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이는 비(非)가시적 후방 지원체계라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바로 살라딘 요새가 그러한 역할을 한 셈이었다.
십자군 전쟁 초기 이슬람 세계는 심하게 분열돼 있었고, 바로 그 틈새를 십자군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살라딘 시대에 이르러 전쟁 양상은 달라졌다. 그는 단지 한 명의 명장에 머문 것이 아니라 이집트와 시리아를 연결하고 분열된 전선을 단일 체계로 엮은 전략가였다. 이 요새 덕분에 이집트는 나일강 유역의 한낱 부유한 왕정국가에서 십자군에 대응하는 이슬람 진영의 핵심 후방기지이자 전쟁을 좌우하는 전략 거점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오늘날 카이로 모카탐 언덕 위에 우뚝 선 살라딘 요새는 지난(至難)했던 역사의 기억을 간직한 채 한결같은 자태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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