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스테이지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프랑스 특유의 감각적 문법 무장
우아한 샹송 묵직한 록 닮은 넘버
황홀한 군무 폭발적 앙상블 감동
무대 모든 장면 명화 같은 깊이감
파국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 청춘
장렬히 불탄 사랑 눈부시게 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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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건 인간의 본능일까, 아니면 지독한 착각일까. 400년 전 셰익스피어가 던진 이 만만치 않은 질문이 2026년 봄 서울 한복판에서 다시금 뜨겁게 회자되고 있다.
거리와 접근성의 방지턱이 은근히 높아 선뜻 발길을 향하기 쉽지 않은 서울 서초동 한전아트센터이지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몰려든 인파의 열기는 그 문턱을 가뿐히 넘어서고 있었다. 우리가 익히 알던 그 뻔한 비극이 맞나 싶다. 17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은 프랑스 특유의 감각적인 문법으로 무장했다. 툭툭 농담을 던지듯이 유쾌하게 흐르다가도 방심하는 찰나를 잡아채고는 관객의 틈을 매섭게 파고든다.
영미권 뮤지컬이 음악과 스토리를 시계태엽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린다면 프랑스산은 감정을 무대 전면에 그냥 순수한 에너지로 쏟아 내는 작품이 많다. 우아하면서도 귀에 콕 박히는 반복적인 주제의 멜로디는 “나는 프랑스 뮤지컬이라오”라며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프랑스 향수를 풍풍 뿌린 듯한 몇몇 넘버는 객석 구석구석을 샹송의 서정성과 록의 묵직한 쇠맛으로 물들인다.
극의 뼈대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이탈리아 베로나를 꽉 쥐고 있는 몬태규와 캐퓰릿이라는 철천지원수 가문의 대립이 바탕이다. 캐퓰릿 가문은 재력가 파리스 백작과 줄리엣을 맺어 주려 무도회를 연다. 그곳에 몰래 잠입한 몬태규 가문의 아들 로미오는 줄리엣과 운명적으로 마주친다.
인간의 역사는 화해보다 반목에 더 익숙해 보인다. 지금 당장 지도를 펼쳐 찾아낼 수 있는 선명한 갈등의 흔적은 우리가 여전히 날 선 증오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증명한다. 제작진은 두 가문의 대립을 부각하기 위해 감각적인 시각 기호를 덧입혔다. 몬태규 가문은 자유롭고 푸른색으로, 캐퓰릿 가문은 열정적이고 붉은색으로 대비시켰다. 두 색채의 충돌은 화해 불가능한 평행선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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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크러배틱과 현대무용이 결합한 군무는 마치 캔버스 위에 물감이 튀어 오르는 듯한 황홀한 환각을 일으킨다. 프랑스 차트를 석권했던 명곡 ‘사랑한다는 것’과 ‘세상의 왕들’이 귓가를 기분 좋게 씻어 내린다. 특히 ‘세상의 왕들’에서 터져 나오는 앙상블은 거대한 파도와 같다. 폭발적 에너지가 무대 경계를 허물고 객석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한다.
이날 주인공 로미오는 그룹 크래비티의 메인 보컬 우빈이 맡았다. 첫 뮤지컬 데뷔라는 소식에 팬들의 기대가 무척 컸을 텐데, 뚜껑을 열어 보니 과연 그럴 만했다. ‘난 두려워’ 같은 넘버에서 우빈이 보여 준 가창력은 그가 왜 팀의 메인 보컬인지 확실하게 증명해 낸다. 팬들 입장에서는 그의 눈부신 성장에 어깨가 으쓱해질 만하겠다.
첫 무대여서 극에 100% 완벽하게 스며들지 못한 순간도 엿보였지만, 오히려 그 풋풋함이 20세 청년 로미오의 치기와 겹쳐 묘한 설득력을 끌어냈다. 무대 위 시간이 쌓여 더 안정적인 연기를 펼친다면 또 한 명의 아이돌 뮤지컬 스타 탄생을 목격하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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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 역의 송은혜는 깜짝 놀랄 만한 기량을 선보였다. 탄탄한 성악적 기교에 소녀풍 음색을 얹어 당차고 아름다운 16세 줄리엣을 빚어냈다. 목을 바짝 조여 소리를 낼 때도 원래 제 소리인 듯 자연스러웠다. 계속 듣고 싶은 목소리를 가진 행복한 배우다.
극의 척추는 슈퍼 조연들의 몫이다. 두 가문의 어머니들이 눈에 들어온다. 레이디 캐퓰릿의 백주연과 레이디 몬태규의 김영주는 실제 동갑내기 절친이라는데, 무대 에서는 서슬 퍼런 적대감을 뿜어낸다. 2층 테라스에서 부르는 대립의 이중창은 압권이다. 어마어마한 성량과 듣는 이의 뱃속까지 울렁이게 하는 감정이 충돌한다. 어쩐 일인지 백주연에겐 슬픔이, 김영주에게는 분노가 더 도드라져 있다.
영주 역 박상돈의 대포 같은 성량과 로렌스 신부 김준오의 드라마틱한 소리 역시 귀를 잡아끈다. 이번 프로덕션의 백미 중 하나는 죽음의 의인화다. 대사는 단 한마디도 없다. 그럼에도 무대 위 ‘죽음’(김경일 분)의 존재감은 시선을 집어삼킨다. 누군가의 목숨이 끊어질 때마다 사신처럼 다가와 황홀한 춤판을 벌이는 그의 움직임은 잔인할 정도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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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내내 짙은 어둠에 잠겨 있다. 하지만 이 어둠은 오히려 회화적 깊이를 더해 주는 지극히 프랑스적인 장치다. 칠흑 같은 무대 위로 핀 조명이 날카롭게 떨어져 인물을 짚어 낼 때마다 관객의 시선이 속절없이 끌려간다. 이 작품 어느 부분을 캡처해도 명화 한 점을 건질 수 있다.
줄리엣의 사촌 오빠 티볼트를 연기한 김순택은 오랜만에 무대에서 만났다. 어떤 역을 맡아도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다. 10년 전이었다면 그는 티볼트가 아니라 로미오였을 것이다.
지독한 비극의 끝에는 다 타 버린 사랑의 재가 남았다. 가문을 향한 맹목적인 애착, 혈육을 잃은 슬픔, 연인에게 내달리는 갈망. 모든 파국은 결국 다른 얼굴을 한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현실은 대개 미적지근한 회색빛에 머문다. 하지만 이날 무대 위 청춘의 선택은 달랐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사랑했고, 기꺼이 죽음을 품에 안았다. 파국은 피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끝에 찾아온 건 증오를 말끔히 씻어 낸 정적, 혹은 평화였다. 끈질기게 따라붙던 죽음도 결국 이 맹렬한 사랑을 완전히 집어삼키진 못했다.
무대 밑바닥에 흥건히 고인 고독, 그 깊은 곳에서 사랑은 도리어 눈이 부시도록 짙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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