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숨소리가 지휘봉이 되어… 편견 허물고 25년째 봉사
나의 소리가 우리의 음악으로…악기 교육 넘어 공동체 의식 배워
학생은 배움 장병은 열정으로…변함없는 동행, 빛나는 선율 선사
20일은 장애인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깊게 하고, 장애인의 재활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제정된 ‘장애인의 날’이다. 지역사회와의 상생 활동을 폭넓게 펼치고 있는 우리 군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에 적극적인 부대가 많다. 그중에서도 해군3함대 군악대의 활동은 유독 눈에 띈다. 전남 유일의 시각장애 특수학교인 은광학교 학생들과 음악을 매개로 편견의 벽을 허물어 온 지 올해로 25년째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학생의 손을 제복 입은 장병이 이끌고, 악보 대신 서로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이들은 가장 솔직한 언어로 대화한다. 소외된 이들의 곁을 지키며 희망을 연주하는 해군의 동행은 군 전투력을 유지하고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고 있다. 제46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25년간 이어져 온 따뜻한 연대의 현장을 조명한다. 글=조수연/사진=조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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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증명한 ‘상생’의 가치
지난 17일 은광학교 관악부 학생들을 태운 노란 버스가 3함대 부대에 들어서자 장병들은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어 이들을 맞이했다. 매주 금요일 이뤄지는 부대 방문이기에 멘토와 멘티로 일대일 매칭된 장병과 학생들은 익숙하게 서로의 손을 잡고 대합주실로 향했다.
대합주실에 들어서자 제각각 흩어져 나오던 악기 소리가 서용덕(원사) 군악대장의 지휘 시작과 함께 가수 이문세의 ‘붉은 노을’ 합주로 모였다. 25년의 내공을 증명하듯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하모니가 부대 내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악기를 연주하는 풍경은 일반적인 오케스트라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장병들은 악보를 볼 수 없는 학생의 곁에 밀착해 낮은 목소리로 다음 음의 진입 타이밍을 알렸다. 연주 중간중간 눈을 맞추기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발로 조용히 박자를 짚어주거나, 어깨를 일정한 속도로 두드리며 박자를 맞췄다.
애국가 1절 연주가 끝났을 땐 한 학생이 “애국가는 1절만 부르겠습니다”라며 무대 위 사회자 멘트를 능청스럽게 흉내 냈고, 진지했던 합주실에는 자연스럽게 웃음이 번졌다.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내공과 화기애애한 유대감이 그대로 묻어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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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 없는 맞춤형 교육
은광학교 관악부 학생들은 1인 1악기를 원칙으로 군악대 지도를 받는다. 시각장애와 자폐 등을 동반한 학생들도 있어 악보를 통한 일괄적인 지도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장병들은 악보 대신 ‘소리’와 ‘촉각’을 교보재로 삼았다.
미국 버클리음대 출신으로 트럼펫 지도를 맡고 있는 류지웅 상병은 악기별 편곡을 도맡아 학생들의 수준에 맞춘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류 상병은 “말로만 설명하기보다 직접 연주하며 다음 음을 하나하나 들려주는 방식으로 지도한다”며 “학생들 개개인에 맞춰 생각하고 가르치면서 나 역시 많은 것을 깨닫고 있다”고 설명했다.
드럼을 배우는 고령의 전맹(빛을 전혀 지각하지 못할 정도로 시각에 장애가 있는 상태) 학생을 위해서는 장병이 곁에서 어깨를 두드리며 박자를 짚어주는 밀착 지도가 이뤄졌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부대 출입이 통제된 2021년에도 군악대와 은광학교의 교류는 멈추지 않았다.
직접 대면하지 못했지만 장병들은 계명창(계이름으로 소리의 높이나 선율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악기별 연주를 온라인으로 공유하는 방식을 통해 원격 강의를 제공하는 섬세함을 보였다.
학생들을 인솔한 은광학교 조은실 음악교사는 “군의 섬세하고 책임감 있는 지도에 매번 놀라고 감사하다”며 “학생들이 부대에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군악대원들을 친형, 오빠처럼 의지한다”고 덧붙였다.
독주에서 합주로… 음악으로 세상과 연결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음악은 세상과 대화하는 새로운 언어다. 따라서 군악대의 지도는 단순한 악기 연주 교육을 넘어 학생들의 정서적 안정과 사회성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은광학교 1학년 김도현 학생은 “서로 다른 악기의 소리가 어우러질 때 누군가와 마음이 이어지는 느낌을 받는다”며 합주의 순간을 묘사했다. 독주가 아닌 합주를 통해 나의 소리가 우리의 음악이 되는 과정을 경험하며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을 배우고 있다.
조 교사는 “협동심이 필수적인 오케스트라 특성상 낯선 군 장병들과 오랜 시간 어우러지는 경험 자체가 아이들의 대인관계 형성과 사회성 발달에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고 설명했다. 군악대원과의 지속적인 만남은 세상과 연결고리로 작용하고, 연주회 때 무대를 향해 쏟아지는 박수갈채는 학생들에게 자존감 향상이라는 훌륭한 자양분이 된다.
25년 세월이 빚어낸 기적
25년이라는 긴 세월은 가르치던 이와 배우던 이의 위치를 바꿔 놓으며 한 편의 기적 같은 서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2002년 자원봉사가 처음 시작될 무렵, 군악대 장병들에게 악기를 배우던 은광학교 관악부 학생 김국준 씨는 현재 모교의 의료재활 교사로 부임해 후배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다. 김 교사는 “군악대와 함께한 음악은 나에게 세상을 향해 내딛는 첫 울림이었다”며 후배들도 자신처럼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2011년 병사 시절 3함대 군악대에서 은광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던 이왕민 중사는 당시 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에 감화돼 음악인의 길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했다. 그는 전문하사로 임관한 뒤 다시 3함대 군악대로 돌아와 10여 년 만에 또다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은주 은광학교장은 “특수학교 교육 현장에서 외부 기관과 25년을 함께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며 “해군3함대 군악대가 우리 학생들을 단순한 봉사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음악 파트너’로 존중해줬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서용덕 군악대장은 “악보 없이 소리만으로 악기를 배워나가는 학생들의 열정과 끈기가 오히려 우리 장병들에게 큰 감동과 배움을 준다”며 변함없는 동행을 약속했다.
군복과 교복이 만나 편견의 벽을 허물어 온 해군3함대 군악대와 은광학교의 25년 하모니는 오는 11월 열릴 합동 연주회에서 대중에게 다시 한번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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