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
덕수궁, 비애의 역사를 품은 곳
조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터
인목대비 폐위 후 석어당서 5년 유폐
인조반정 후 광해군 폐위 교서 내려
석조전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건물
돈덕전 외국 사절 접견·연회장소
고종은 명성황후 사후 제례 올리기도
일제에 퇴위당한 뒤엔 만년 보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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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면 구보는 어김없이 덕수궁을 찾는다. 수양벚꽃과 살구꽃을 보기 위함이다. 석조전과 석어당의 동반자 같은 존재들이다. 꽃이 있는 풍경이지만 덕수궁은 어쩐지 비감을 풍긴다고 느낀다. 건물들이 안고 있는 사연 때문이다.
덕수궁은 세조의 장손으로서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5~1489)의 집터였다.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이 불타자 몽진에서 돌아온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정릉동 행궁’이 됐다. 광해군 때 경운궁으로 승격되고, 순종 때 덕수궁으로 개칭해 오늘에 이른다.
본전인 석조전은 유럽 궁정건축 양식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광무제)의 숙소 겸 사무실 공간용으로 지었다. 길이 54m, 높이 31m의 3층 석조건물에는 황제의 접견실과 귀빈 대기실, 식당, 침실, 거실, 욕실 등을 두루 갖췄다. 탁지부 고문이던 영국인 맥리비 브라운(1835~1926)이 제안해 1898년 영국인 하딩의 설계로 시공, 1910년 완공했다. 하지만 고종은 건물이 완공되기 전에 제위를 잃었다.
석조전 뒤편의 돈덕전은 초라했던 우리 근대사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던 공간이다. 건물 앞 회화나무는 늙어 지친 모습으로 커다란 덩치를 부목에 기대고 있다. 내부 오른쪽 황제가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어실에는 가상현실(VR) 영상이 그때의 풍경을 전하고 있다. 사신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세 번에 걸쳐 절을 하며 용상 앞으로 다가가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당시 미국 공사관 외교관인 W.F. 샌즈가 쓴 『조선 비망록』에도 그대로 묘사돼 있다. “알렌 박사와 나는 세 번 허리 숙여 인사를 한 뒤 조그마한 탁자 앞으로 다가갔는데, 황제와 황태자가 황금빛 장막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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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덕전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예식’에 맞춰 지었다. 세관으로 사용하던 기와집이 있던 자리였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유행하던 화려한 건축양식을 빌려왔다.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여는 장소로 사용했다. 외국 국빈급 귀빈들의 숙소로도 쓰였다. 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여기서 머물렀다. 그러나 고종의 칭경 예식은 끝내 치러지지 못했다. 건물만 남아 있다가 1920년대에 해체된 것을 2023년 9월 복원했다.
석조전 앞 2층 목조 건물은 단청을 입히지 않아 햇살에 바랜 나무 기둥과 세월의 무게만큼 살짝 처진 처마 끝을 보인다. 석어당(昔御堂)이다. ‘옛날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이다.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제 이름 안에 새겨 넣은 이 전각은 덕수궁에서 가장 낡은 건물이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2층 규모이고 팔작지붕을 이고 있다. 궁궐 건물치고는 소박하다. 처음부터 궁궐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피난 끝에 돌아온 선조가 ‘일단 머물 곳’으로 급히 지은 집이었다.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 뒤 이듬해인 1905년 중건됐다(『고종실록』 광무 8년 4월 14일). 고종이 이곳을 자신의 처소로 삼으면서 ‘명성황후의 국상을 기려 단청을 올리지 않았다’고 전한다(『덕수궁』).
석어당은 광해군의 스토리도 품었다. 광해군은 1618년 이 석어당에 인목대비를 유폐했다(『광해군일기』 10년 1월 23일). 인목대비는 선조의 계비로, 영창대군의 어머니다. 광해군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 죽게 하고(『광해군일기』 6년 2월 10일), 대비마저 폐위해 서인으로 강등한 뒤 덕수궁 안에 가뒀다. 인목대비는 이후 5년간 석어당 일대에 갇혀 지냈다. 아들을 잃고 왕후 지위를 빼앗기고,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이 집 안에서 세월을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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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겐 살구나무가 함께했다. 그때의 살구나무와 동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보는 그 자리에 살구나무가 계속 존재하게 된 자체가 어떤 기억을 이어가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1623년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나자 인조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이 대비가 기거하던 이 석어당이었다.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대비는 죄목을 열거하며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왕으로 인정하는 교서를 내렸다(『인조실록』 1년 3월 13일). 한 건물 안에서 엎치락뒤치락이 함께 이뤄진 것이다.
석어당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말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간판을 바꿔 단 시기였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가 1년여 만에 환궁한 고종이 경운궁을 정식 궁궐로 격상시키고 여러 전각을 새로 짓거나 개수했다. 석어당은 고종의 침전이자 생활 공간으로 쓰이게 됐다. 고종은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들의 칼에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혼백을 달래는 제례를 석어당 뜰에서 여러 차례 올렸다고 전해진다(『우리 궁궐 이야기』). 구보는 그 이야기가 이 건물에 쌓인 비감의 층위를 한 겹 더 두텁게 만드는 것을 감지한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당한 후 석어당에서 만년을 보냈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긴 후 매일 바라보던 마당. 그곳이 석어당의 마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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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면 석조전 앞에는 수양벚나무가 흐드러지게 자태를 뽐낸다. 꽃잎들이 발산하는 분홍빛이 마음에 봄을 심어주는 느낌을 받게 한다. 꽃잎들이 바람에 지는 풍경도 놓칠 수 없는 장관이다. 꽃샘바람이 부는 날엔 꽃잎들이 휘날리며 분홍빛 바람을 시각화하는 극적 효과를 자아낸다. 이맘때쯤이면 사진 애호가들이 이 나무 앞에 줄을 선다.
석어당 앞 살구꽃도 고혹적인 자태를 뽐낸다. 구보는 석어당 살구꽃에서 은은한 동양 미인을, 석조전 수양벚꽃에서는 화려한 서양 미인을 연상하곤 한다. 고종도 이 수양벚꽃을 보았을 터다. 당시 일본 도쿄의 왕궁에도 봄이면 벚꽃이 만개했을 것이다. 왕궁을 에워싸는 해자 옆으로는 지금도 벚꽃이 봄의 장관을 연출한다. 하지만 고종과 메이지 일왕이 벚꽃을 바라보는 심사는 달랐을 것이다. 한쪽은 나라의 장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으로 우울하게 바라봤을 것이고, 다른 쪽은 하루가 다르게 뻗어나가는 국력에 흡족한 자부심으로 술잔을 들며 완상했을 것이다.
1852년 생으로 동갑인 두 사람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메이지 일왕이 현신들의 보좌를 받아 국왕으로서 갖춰야 할 소양과 능력을 함양하는 기간에 고종은 권력의 사유화를 꾀하는 주변 인물들 탓에 지도자 수업을 제대로 밟지 못했다. 이 차이가 향후 양국 운명을 갈랐고, 그 잔상은 덕수궁에 오롯이 남았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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