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예술
미술관의 문법 ④ 뮤지엄 산(SAN)의 사유-산이 품은 미술관, 미술관이 품은 산
건축거장 안도 다다오가 8년 걸쳐 완성한 역작
강원 원주 산자락에 ‘빛과 물, 침묵’ 철학 녹여
건축·정원·명상공간, 치악산 능선 따라 물 흐르듯
‘숯의 작가’ 이배 展…‘생명과 소멸’ 산에 스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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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건물의 입구일까, 아니면 전시실의 문턱일까? 뮤지엄 산(Museum SAN)은 이 질문에 이름으로 답한다. SAN은 Space(공간), Art(예술), Nature(자연)의 첫 글자이자 미술관이 자리한 산(山)을 의미한다. 이름 자체가 곧 이곳의 철학을 담고 있다. 강원 원주시 오크밸리 내 해발 275m 산자락에 있는 이 미술관은 한솔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사립미술관이다. 이인희 고문이 40여 년에 걸쳐 수집한 ‘청조 컬렉션’과 1997년부터 이어온 종이박물관을 통합해 2013년 개관했다.
안도 다다오 건축에 스며든 현대미술?제임스 터렐과 안토니 곰리
뮤지엄 산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2005년부터 2013년까지 무려 8년에 걸쳐 완성한 역작이다. 미술관은 건축, 정원, 명상 공간이 결합된 복합 프로젝트로 총길이 700m에 달하는 부지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처럼 산 능선을 따라 펼쳐진다. 안도는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느꼈던 산세의 아늑함을 설계에 담고자 했다. ‘서울에서 두 시간이나 걸리는 이 산골에 누가 오겠냐’며 스스로도 반신반의했다는 일화가 무색하게 현재 이곳은 연간 20만 명이 찾는 문화적 랜드마크이자 명상의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안도의 건축을 관통하는 핵심은 빛과 물, 그리고 침묵이다. 웰컴센터에서 플라워 가든, 워터 가든, 본관, 스톤 가든, 명상관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미술관이라기보다 수행을 위한 산책로에 가깝다. 특히 워터 가든은 하늘과 구름, 건축 윤곽을 수면 위에 비추며 공간을 확장하고, 본관 내부로 스며드는 자연광은 시간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하며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한다. 이곳에서 건축은 감각을 조율하는 장치로 역할을 한다.
뮤지엄 산은 예정보다 개관을 1년 늦췄는데, 여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바로 ‘빛의 마술사’ 제임스 터렐의 상설관을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터렐관은 건축을 캔버스로 삼아 빛 자체를 경험하는 네 개의 작품을 통해 관람객을 명상의 시간으로 이끈다. 천장의 타원형 구멍을 통해 하늘의 실시간 변화를 목격하는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를 지나 계단 끝 사각형 창이 만드는 빛의 환영인 ‘호라이즌(Horizon)’에 닿으면 감각은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간츠펠트(Ganzfeld)’에 이르러 경계가 사라진 몽환적인 빛의 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체험은 인간의 시·지각이 얼마나 쉽게 교란될 수 있는지, 동시에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깨닫게 한다. 마지막 ‘웨지워크(Wedgework)’는 미세한 빛으로 공간을 구획하며 실재하지 않는 벽을 만들어낸다. 터렐의 공간에서 우리는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빛 속에 ‘거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지난해 뮤지엄 산은 또 하나의 공간을 선보였다. 안도와 영국의 조각가 안토니 곰리의 협업으로 탄생한 ‘그라운드(Ground)’다. 세계 최초의 안토니 곰리 상설관이기도 한 이 공간은 뮤지엄 산 초입 플라워 가든 아래 조성됐다. 이곳은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며 점차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되는 구조를 취한다.
내부 지름 25m, 높이 7.2m의 돔형 공간은 판테온을 연상시키는 장엄함을 지니고 천장 중앙의 원형 개구부와 측면 개방부를 통해 자연광과 풍경을 끌어들인다. 실내조명이 없는 이 공간은 온전히 자연의 빛에 의존하며 시간과 계절에 따라 매번 다른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이곳에 곰리의 ‘블록 웍스(Block Works)’ 조각 7점이 배치돼 있다. 안도는 “그라운드는 100년, 200년 후에도 남아 아름다운 자연과 작품 사이 관계를 형성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낼 것”이라며 뮤지엄 산이 지향하는 시간의 철학을 제시했다.
숯의 귀환…이배의 ‘En attendant: 기다리며’
2026년 4월 뮤지엄 산은 또 다른 의미 있는 전환을 맞았다. 뮤지엄 산에서 개최되는 한국 작가 최초의 개인전인 ‘숯의 작가’ 이배의 대규모전 ‘En attendant: 기다리며’가 그것이다.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숯이라는 매체에 천착해 온 이배의 회화부터 조각, 설치 미술, 영상 작품까지 작가의 모든 작업을 전례 없는 스케일과 깊이로 선보이는 전시다.
특히 이번 전시는 뮤지엄 산이 개관 이후 지속적으로 선보여 온 국제 작가 중심의 기획 흐름 속에서 다시 한국 작가로 시선을 돌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애초에 이 미술관은 한국 근현대 미술 컬렉션을 기반으로 출발한 곳으로, 이배의 초대는 그 정체성을 재확인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는 동시대 한국 미술이 지닌 물질적·철학적 깊이를 국제적 맥락 속에서 다시 위치시키려는 제안이기도 하다.
이배에게 숯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소멸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로 재탄생하는 물질의 원리를 체현하는 존재로 미술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가 교차하는 관계망을 심층적으로 조망하는 역할을 한다. 전시는 본관 입구의 8m 높이 대작 ‘불로부터’를 시작으로 총 6개의 공간을 관통하며 펼쳐진다. 청조갤러리 로비의 대형 ‘붓질’ 16점은 자연의 빛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 속에서 마치 춤을 추듯 시시각각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3관 ‘비커밍(Becoming)’에서는 ‘농부의 아들’이라는 작가의 정체성에 주목한 9m 스크린 영상과 실제 흙으로 구현된 논 설치물이 땅과 신체, 시간의 순환을 가시화한다. 뮤지엄 산 곳곳에 배치된 10m 규모의 브론즈 조각 ‘붓질’ 6점은 주변 산세 및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과 호응하며 자연과 예술이 결합된 확장된 풍경을 완성한다. 관람객이 공간과 작품 사이를 이동할 때 비로소 예술과 자연이 하나의 경험으로 완성되며 뮤지엄 산의 철학인 ‘Space-Art-Nature’가 이배의 동양적 사유와 포개진다.
뮤지엄 산이 지난 10여 년 동안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미술관은 작품의 전시 공간이기 이전에 작가와 건축가, 자연이 함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장소라는 방향성이 잘 드러난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물이 자연의 일부가 되듯, 터렐의 빛이 하늘과 연결되고, 곰리의 철제 조각이 녹슬며 대지와 합일되고, 이배의 숯이 소멸을 거쳐 다시 생명을 품듯이 뮤지엄 산에서 모든 것은 서로에게 스며든다. 서울에서 두 시간을 달려 이 산자락을 찾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특정 작품이라기보다 감각이 다시 깨어나는 경험이다. 산이 미술관이 되고 미술관이 다시 산으로 환원되는 이곳에서 예술은 가장 느린 속도로 우리 삶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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