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눈물 닦아준 산의 여왕 “어서 오라” 메아리

입력 2026. 04. 16   16:41
업데이트 2026. 04. 1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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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인문학 - 두 도시 이야기
말레이시아 페낭과 스위스 루체른 下

앨버트 공 죽음으로 7년간 우울증 앓은 빅토리아 여왕, 남편의 흔적 따라 조랑말 타고 리기산 정상에… 
능선 따라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에메랄드빛 루체른호수와 붉은 지붕 마을 풍경
빅토리아를 사랑한 영국인 발길 이어지자 세계 최초로 패키지여행·산악철도 만들어져
중세 목조 덮개 다리 카펠교·마지막 숨 몰아쉬는 사자상…이야기와 풍경 어우러져 세계가 동경하는 로맨틱 명소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군림했던 영국 황금기의 한가운데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있다. 영국은 말레이시아 페낭을 비롯한 동양에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철도망을 확장하고 산업혁명을 거쳐 세계 최강국으로 도약했다. 풍요로워진 자본은 여행이라는 새로운 여가문화를 자극했다. 여왕이 찾은 스위스 루체른은 곧바로 영국인이 선호하는 휴양지가 됐다. 가난한 시골 마을에 불과하던 루체른이 왕실과 귀족의 사랑을 받는 여행지로 탈바꿈하며 도시의 운명도 바뀌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올라 더욱 유명해진 리기산은 ‘산들의 여왕’으로 불린다. 정상부에서 알프스와 주변 호수를 360도로 조망할 수 있는 파노라마 뷰가 압권이다. 필자 제공
빅토리아 여왕이 올라 더욱 유명해진 리기산은 ‘산들의 여왕’으로 불린다. 정상부에서 알프스와 주변 호수를 360도로 조망할 수 있는 파노라마 뷰가 압권이다. 필자 제공



현대 패키지여행의 탄생


우리의 스위스 첫 하이킹은 루체른 리기산이었다. ‘산들의 여왕’으로 불리는 리기산은 호수, 알프스, 초원이 어우러진 능선이 특히 아름다웠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에메랄드빛 루체른호수와 붉은 지붕의 마을 풍경은 그야말로 숨이 멎을 듯했다.

산을 오르던 중 마을에서 준비해 간 소시지를 꺼내 구워 먹었다. 리기산 곳곳에는 하이커들이 가져온 음식을 마음껏 구워 먹을 수 있도록 야외 바비큐장이 잘 마련돼 있다. 누구나 바비큐장에서 불을 켤 수 있지만 마지막에 떠나는 이는 반드시 깨끗한 물로 불을 꺼야 한다는 암묵적 룰도 있다. 알프스를 지키기 위한 스위스인의 약속이다. 맛있는 식사로 잠시 숨을 고른 뒤 정상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자 맑은 하늘 아래 탁 트인 초원이 우리를 맞았다. 그 순간 빅토리아 여왕이 왜 이곳에서 상실의 슬픔을 달랬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1861년 남편 앨버트 공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7년 가까이 두문불출하며 상복인 검은 옷조차 벗지 못하던 여왕에게 궁정 의사들은 긴 여행을 권했다. 리기산은 이미 18세기 유럽 상류층 자제들이 가정교사와 함께 외국을 여행하며 언어·예술·예법을 익혔던 ‘그랜드 투어’를 통해 빼어난 풍광이 널리 알려진 곳이다. 앨버트 공 역시 생전에 리기산을 찾았고, 산에서 꺾어 말린 알펜로제를 빅토리아 여왕에게 건네준 일화가 있다.

여왕은 마침내 칩거를 깨고 남편의 흔적을 따랐다. 조랑말을 타고 리기산 정상에 올라 일출을 맞이했다. 그의 5주간 방문은 루체른이 단순한 시골 마을에서 세계적인 관광지로 도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영국인은 빅토리아 여왕을 깊이 사랑했고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했다. 당연히 여왕이 선택한 여행지는 순식간에 국민들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여왕의 방문 직전인 1863년 토머스 쿡이 영국 중산층 무리를 이끌고 최초의 단체관광을 시도했다. 영국에서 출발해 프랑스 파리를 거쳐 루체른에 도착한 이 여행은 현대 패키지여행의 출발점이 됐다. 이전 ‘그랜드 투어’가 귀족만의 특권이었다면 쿡은 교통·숙박·식사를 하나의 가격으로 묶는 ‘패키지여행’을 도입하며 여행의 진입 문턱을 낮췄다. 루체른을 무대로 성공을 거둔 쿡은 이후 자신의 이름으로 세계 최초의 여행사를 세우고 세계일주 기차 티켓과 여행자 수표까지 판매하며 현대여행의 선구자가 됐다. 결국 페낭과 인도 식민지 무역에서 쌓인 영국 부르주아의 자본은 여가문화를 꽃피웠고, 그 흐름이 알프스의 가난한 마을을 세계적인 관광허브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쿡의 패키지여행과 빅토리아 여왕 방문 이후 수요가 입증된 리기산에는 유럽 최초의 산악철도가 놓인다. 인근 정치인과 상인은 빈곤한 농촌을 관광으로 일으켜 세우려 했고, 호텔 사업가들은 열차가 영업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자 적극적으로 자본을 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루체른은 스위스를 찾는 여행자의 첫 번째 목적지가 됐다. 그렇게 도시는 근대관광의 발상지이자 오늘날까지 스위스의 대표여행지로 자리매김했다.

 

스위스 등산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바비큐장.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마을에서 관리한다. 산불 예방을 위해 마지막 이용자는 떠나기 전 깨끗한 물로 불을 꺼야 한다.
스위스 등산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바비큐장.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마을에서 관리한다. 산불 예방을 위해 마지막 이용자는 떠나기 전 깨끗한 물로 불을 꺼야 한다.

 

1871년 개통된 유럽 최초의 산악철도 리기산 열차. 선로 가운데 설치된 톱니바퀴 랙시스템을 이용해 가파른 경사구간도 안정적으로 오를 수 있다.
1871년 개통된 유럽 최초의 산악철도 리기산 열차. 선로 가운데 설치된 톱니바퀴 랙시스템을 이용해 가파른 경사구간도 안정적으로 오를 수 있다.



불굴의 스위스 용병

스위스 중앙부에 자리한 루체른은 북부 유럽과 이탈리아를 잇는 알프스 관문도시다. 1798년 헬베티아공화국 시절에는 잠시나마 수도의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비록 최종 수도로 선정되진 않았지만 1848년 연방 수도를 결정할 당시에도 베른, 취리히와 함께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됐다. 오늘날 루체른은 스위스 가톨릭의 중심지이자 주요 행정기관이 자리한 정치·문화의 도시로 남아 있다.

루체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은 카펠교다. 루체른의 사진엽서를 장식하는 이 다리는 14세기경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 위에 세워진 중세 목조 덮개 다리다. 다리 한가운데 우뚝 선 물탑은 시대에 따라 감옥, 보물창고, 기록보관소 등으로 사용됐다. 내부에는 17세기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지만, 1993년 화재로 상당수가 소실됐다. 이후 복원작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카펠교보다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빈사의 사자상’이었다. 작은 공원 절벽에 새겨진 이 부조상은 루체른의 역사를 모른다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래서인지 카펠교에 비해 방문객이 적었다. 거대한 바위를 파서 만든 사자는 방패에 머리를 기대고 창에 찔린 채 마지막 숨을 고르는 모습이었다. 사자상은 1792년 프랑스혁명 때 튀일리궁을 지키다가 전사한 760여 명의 스위스 용병을 기리는 추모비다. 마크 트웨인이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찬탄한 이 조각상은 스위스 용병이 간직한 충성과 비극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 준다.

스위스 용병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바티칸에서 교황을 호위하는 근위대가 바로 그들이다. 전쟁 한복판에서 보여 준 그들의 충성심은 오늘날 교황청을 지키는 살아 있는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스위스 용병의 역사는 가난에 시달리던 루체른의 처절한 몸부림과 맞닿아 있다. 척박한 산악지형에서 생계를 잇기 어려웠던 루체른 사내들은 수백 년간 유럽 각국의 ‘용병’이 돼 가족을 먹여 살렸다.

 

 

1333년 세워진 목조 트러스 구조 카펠교.
1333년 세워진 목조 트러스 구조 카펠교.

 

카펠교 내부에는 17세기 당시 역사와 성인들의 생애를 담은 삼각형 패널 그림이 걸려 있어 걷는 것만으로도 중세 박물관에 온 듯하다.
카펠교 내부에는 17세기 당시 역사와 성인들의 생애를 담은 삼각형 패널 그림이 걸려 있어 걷는 것만으로도 중세 박물관에 온 듯하다.

 

절벽을 깎아 만든 ‘빈사의 사자상’. 역사적 비극과 루체른 출신 용병들의 충성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소다.
절벽을 깎아 만든 ‘빈사의 사자상’. 역사적 비극과 루체른 출신 용병들의 충성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소다.



빌헬름 텔, 자유의 상징 

빅토리아 여왕과 스위스 용병 외에 루체른 지역을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 바로 빌헬름 텔이다. 스위스 연방(헬베티아)의 기원은 단순한 국가 건설이 아니었다. 1291년 루체른호수 주변 세 지역 공동체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가혹한 통치에 맞서 방어동맹을 맺은 데서 시작됐다. 이 사건의 무대는 루체른호수 변 뤼틀리 초원으로, 배경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빌헬름 텔의 전설이 깔려 있다.

13세기 후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위스 지역을 포함해 영토를 확장했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와 북유럽을 잇는 고트하르트고개 무역로가 열리면서 이 지역의 경제적·전략적 가치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는 이를 장악하려 주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물리고 가혹한 통치를 펼쳤다. 그 유명한 ‘사과 쏘기’ 전설도 이 맥락에서 나왔다.

지방관이 장대 위에 걸어 둔 자기 모자에 인사하지 않은 빌헬름 텔에게 아들의 머리에 놓인 사과를 활로 쏘아 맞히면 무례를 용서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합스부르크의 압제에 맞선 스위스인의 자유의지를 상징하며 국민적 자부심을 형성한 서사로 남았다. 합스부르크와의 대립은 그렇게 끝난 듯했지만 스위스 내부 종교분쟁 속에서 루체른은 뜻밖의 선택을 한다. 조상들이 쫓아낸 적과 손잡는 스위스 민족 역사상 가장 큰 역설을 보여 준 것이다.

16세기 루체른 지배층의 최대 위협은 합스부르크가 아닌 종교개혁 세력으로 바뀌었다. 척박한 산악지대에서 농업이 어려웠던 루체른은 용병 송출로 경제를 유지해 왔다. 취리히를 기반으로 활동한 신학자 울리히 츠빙글리는 이를 “동포의 피를 팔아 배를 채우는 짓”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취리히에서 루체른까지는 자동차로 40분가량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가까운 이웃 도시다. 용병계약으로 부를 쌓던 루체른 귀족들에게 츠빙글리의 목소리는 생존 위기로 받아들여졌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신교도시 취리히·베른·제네바에 맞설 강력한 종교적 후원자가 필요했다. 스스로를 가톨릭의 ‘수호자’라고 밝힌 합스부르크가 딱 들어맞았다. 루체른은 합스부르크와 손잡고 신교와 싸울 가톨릭 세력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조상들은 자유를 위해 합스부르크를 몰아냈지만 후손들은 용병제라는 기득권을 지키고자 합스부르크를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이 아이러니는 루체른의 깊은 역사적 딜레마이지만 그렇게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용병제를 지켰다.

취리히와 제노바 등 신교도시들이 상업과 공업으로 급변하는 사이 루체른은 산업화와 탈종교화를 거부했다. 그들이 지켜 낸 종교축제, 중세다리 등 고전적 풍경이 19세기 영국인이 열광한 ‘로맨틱 루체른’의 원형이 됐다. 빅토리아 여왕이 이곳에서 느꼈던 안정과 치유도 루체른이 간직한 이 보수적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빅토리아의 시간

열차가 산을 오르고 쿡의 단체여행객이 모이자 가난한 알프스 마을은 세계가 동경하는 로맨틱한 명소로 피어났다. 카펠교를 걷는 사람들의 소리, 빈사의 사자상 앞의 고요함, 뤼틀리 초원의 바람 소리가 어우러진 루체른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그것은 수백 년의 역설과 충성, 치유의 서사가 빚어낸 역사다. 불굴의 용병처럼 고난을 이겨 낸 사내들의 발자취, 빌헬름 텔의 화살처럼 자유를 향한 투쟁, 빅토리아 여왕의 눈물처럼 치유의 순간들까지. 루체른은 합스부르크의 압제와 종교분쟁의 소용돌이에서도 고유한 전통을 수호했다.

페낭의 조지타운과 루체른.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두 도시는 빅토리아 시대라는 거대한 역사의 톱니바퀴 속에서 서로 연결돼 있다. 페낭이 영국 동인도회사 무역으로 제국의 부를 창출한 ‘자본의 기원’이었다면 루체른은 그 부를 바탕으로 영국인이 세계를 향해 눈을 돌린 ‘관광의 완성’이었다.


필자 김은덕·백종민은 여행작가다. 부부가 함께 쓴 공저로 『여행 말고 한달살기』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 등이 있다. 유튜브 ‘띵크띵스’도 운영 중이다.
필자 김은덕·백종민은 여행작가다. 부부가 함께 쓴 공저로 『여행 말고 한달살기』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 등이 있다. 유튜브 ‘띵크띵스’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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