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페르소나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에서 보여준 러블리의 새로움
강하고 차가운 엘리트 여성에 열광하는 요즘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다가와
구시대적일 수 있는 주인공 연기력으로 바꿔
예쁘고 맑으면서 주체적인 여성의 매력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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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대에도 ‘사랑스러움’은 통할까. 현재의 대중은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는 ‘쿨걸’이나 차가운 엘리트 여성에게 더 열광한다. JTBC 드라마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에서 이의영(한지민 분)이란 인물은 이 흐름에서 어딘가 벗어나 있다. 그녀가 일하는 힐스호텔에서 이의영은 원하는 물건을 적재적소에 준비해 놓는 구매팀 선임으로서 능력자의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사적 영역에서 그녀는 서른넷의 나이까지 일에만 집중하다 보니 연애다운 연애 한 번 해 보지 못해 ‘소개팅’을 하는 여성이다. 게다가 그녀가 보이는 모습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매력 그 자체다. 과연 이런 인물이 현 시대에도 대중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은 그런 의미에서 한지민에게도 도전적인 선택일 수 있었다. 자칫 구시대적 이미지로 보일 수 있어서다.
한지민은 이의영이란 인물의 공적인 면과 사적인 면을 분리해 어찌 보면 상반될 수 있는 이미지를 상황에 따라 달리 보여 준다. 호텔에선 위기상황에도 즉각적으로 잘 대처하는 리더십을 드러낸다. 당장 급하게 식재료를 구해야 하는 위기에도 경쟁 호텔 측과 딜을 해 해결하는 순발력을 발휘한다.
특히 인턴으로 들어온 심새벽(김소혜 분) 같은 후배의 실수와 잘못을 나무라기보다 토닥여 주고 위로하는 포용력을 갖추고 있다. 즉 공적인 차원에서 이의영이란 인물의 능력과 카리스마를 먼저 이 캐릭터의 매력으로 끌어낸다. 그런 뒤 이 인물의 사적인 연애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감정 소모에 지쳐 ‘사랑도 가성비’라고 여기는 그녀는 생애 첫 소개팅에서 너무나 상반된 매력의 두 남자를 만나 갈등하게 된다.
이의영이 갈등하는 두 인물, 송태섭(박성훈 분)과 신지수(이기택 분)는 ‘안정감’과 ‘짜릿함’을 각각 표상하는 남성들이다. 송태섭은 매사에 신중한 ISTJ 성향으로, 묵묵하고 꾸준하며 세심한 매력을 발산하면서 결혼을 생각하고 싶게 만드는 ‘정착지’의 편안함을 준다.
신지수는 이의영과 같은 ENFP 성향으로, 예측 불가능한 플러팅을 통해 도파민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일탈’을 선사한다. 결혼 압박이나 나이 고민 등 자칫 낡은 로맨틱 코미디의 클리셰로 비칠 수 있는 설정 속에서도 한지민은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현대여성의 철저한 실용주의적 태도와 내면적 결핍을 특유의 깊이 있는 연기로 돌파해 낸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한지민이 이의영이란 인물을 일관성 있는 캐릭터로 그리면서도 단선적 인물이 아니라 상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다층적 인물로 설득시킨다는 점이다. 직장생활에서는 든든한 프로의 면모를 보여 주고, 달달한 연애에선 차분함(송태섭을 만날 때)과 설렘(신지수를 만날 때)을 오간다.
이러한 다층적인 이의영 캐릭터가 단순히 사랑에 목마른 인물을 넘어 입체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건 한지민의 치열했던 연기 경험 덕분이다. 데뷔 초 ‘순백’과 ‘착한 여자’의 대명사였던 그녀는 영화 ‘조선명탐정’에선 유혹적인 요부의 모습을, 또 ‘미쓰백’에서는 밑바닥 삶을 사는 전과자 역할을 맡아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를 철저히 파괴한 바 있다. 이후 ‘눈이 부시게’ ‘봄밤’ 등의 작품을 거치며 현실에 굳게 발 딛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상처와 이기적인 욕망을 그려 온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 단순히 예쁘고 맑기만 한 게 아니라 짙은 현실의 피로감과 고민 역시 한 캐릭터 안에 담아내는 성숙한 융합을 보여 줬다.
최근 콘텐츠들은 주체적 여성을 표현하고자 기계적으로 ‘강인함’과 ‘냉혹함’을 입히는 경향이 있다. 한지민은 자신만의 전매특허인 ‘사랑스러움’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완벽한 주체성을 획득하는 차별화된 방식을 시도했다. 이의영은 겉보기엔 한없이 다정하지만, 그 내면은 연애의 효율성을 하나하나 저울질하는 냉철함도 갖고 있다.
선택권에 있어서도 남성에게 넘기고 수동적 위치에 서는 게 아니라 주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송태섭과의 첫 만남 때 “나와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에 동의하시나요?”라고 했던 그의 질문에 질색했던 이의영이 점점 그를 알아가며 좋아하게 된 뒤 마지막에는 스스로 같은 질문을 송태섭에게 던지는 장면이 그걸 말해 준다. 프러포즈 하면 남성이 커플반지를 준비하는 것으로 전형화돼 있다고 여기지만, 이의영은 그 상황에서도 그걸 뒤집어 자신이 역질문을 던지는 주도적 선택을 한다.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에서 한지민이 그려 낸 페르소나는 ‘냉정한 현실’을 이해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사랑스러움과 온기를 잃지 않는 실용적인 로맨티시스트다. 그저 평범하고 흔한 로맨스물의 여주인공 같지만, 한지민은 이 인물이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독해지거나 강한 면모를 의도적으로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걸 보여 줬다. 본연의 다정함을 간직하면서도 척박한 현실 안에서 삶의 방향타를 쥐고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강인함이 그것이다.
결혼은 물론 사랑, 아니 연애도 쉽지 않은 시대라고 한다. 그만큼 현실적인 무게가 미혼남녀의 당연한 만남이나 사랑조차 쉽게 받아들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결혼에 덧씌워지곤 하는 가부장적 그림자는 더더욱 사랑을 요원하게 만든다. 연애도, 사랑도 마치 한판 싸움을 벌이듯이 강해져야 가능한 무엇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 좋은 만남을 이어 가는 게 꼭 강하다고만 되는 일인가. 이제 상황에 따른 여러 페르소나를 자유자재로 가질 수 있는 현명함이 요구되는 시대다. 한지민의 연기세계가 담아내는 당당함과 러블리함을 동시에 가진 다층적인 페르소나가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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