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장의 무지로 뺏긴 대륙, 참전용사 피로 되찾다

입력 2026. 04. 13   16:24
업데이트 2026. 04. 1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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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Ⅲ 
아프리카-케냐 ③

부족 사회 허점 파고든 유럽 열강
손쉽게 아프리카 대륙 식민지화
2차 대전 동원된 원주민 병사들
자립의지 키워 독립전쟁 이끌어
英 철도 건설로 자원 수탈 등 본격화
몸바사행 구간 식민 흔적·개발 교차
메마른 초원·대지, 대륙 현실 드러내
기차역서 中 ‘일대일로’ 정책 흔적도

몸바사 원주민 참전용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참전 기념탑.
몸바사 원주민 참전용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참전 기념탑.

 

아프리카는 왜 손쉽게 유럽 여러 나라의 식민지가 됐을까? 그 이유는 원주민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아프리카는 수많은 부족이 살고 있었다. 즉, 국가나 민족보다는 부족 중심의 사회 구조였다. 유럽은 국가라는 체계적인 조직이 없는 아프리카에서 부족장만을 상대했다. 족장은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거나 선물을 받는 조건으로 협정을 쉽게 체결했다. 보호령 서류에 서명하고, 땅의 권리를 양도한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이들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사진=필자 제공

아프리카 독립을 주도한 흑인 참전용사

아프리카 쟁탈전에 뛰어든 국가는 영국, 프랑스, 독일,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등이다. 그 가운데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영국은 카이로·케이프타운·캘커타를 종단으로 잇는 ‘3C 정책’을, 프랑스는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취했다. 영국 식민정책의 일등 공신은 동아프리카회사였다. 동아프리카회사의 최초 업무영역은 무역이었지만 곧 원주민을 통치하는 기구로 변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 식민지였던 탄자니아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은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자주독립의 꿈을 가졌다. 이들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쟁터에서 투쟁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아프리카에서 영국은 37만4000명, 프랑스는 16만 명의 원주민 병사를 동원했다. 전쟁이 끝난 뒤 원주민 참전자들은 아프리카 곳곳에서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1960년 16개를 필두로 1975년까지 48개 아프리카 국가가 독립했다. 마지막으로 짐바브웨(1980년), 남아프리카공화국(1994년)이 독립 대열에 합류했다.

몸바사로 가는 열차에서 바라본 아프리카의 황량한 초원.
몸바사로 가는 열차에서 바라본 아프리카의 황량한 초원.

 

몸바사행 열차와 메마른 아프리카 초원
나이로비·몸바사 철도는 식민지 흔적과 최신 교통망이 겹쳐 있다. 고속철도 옆에는 영국이 건설한 130년 전의 낡은 협궤가 그대로 남아 있다. 1896년 몸바사에서 시작된 철도 공사는 1901년 나이로비를 거쳐 북서쪽 빅토리아 호수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2017년 중국 지원으로 표준궤 일반철도가 완공됐다. 철로 옆에는 폐기된 듯한 낡은 옛 철로가 남아 있다. 

몸바사로 가는 열차 밖으로 광대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러나 ‘풍요로운 초록 아프리카’와는 너무 달랐다. 누런 황갈색 풀은 바싹 말랐고, 큰 나무는 없었다. 땅은 군데군데 갈라져 비옥한 느낌이 없다.

아프리카 인구의 일부는 하루 한 끼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다. 굶주림의 주원인은 가뭄과 내전이다. 가뭄으로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수확량이 줄어들었다. 사하라 사막은 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가뭄이 휩쓴 지역은 메뚜기 떼가 습격해 얼마 남지 않은 농작물까지 완전히 먹어 치웠다. 6시간을 쉼 없이 달리는 열차 속에서 지하수 개발, 대수로 공사로 광대한 초원을 비옥한 농경지로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차보강 철도공사와 식인사자 습격 사건

영국 식민지 시절 케냐 종단 철도공사에는 3만2000여 명의 인도 노동자가 투입됐다. 공사 기간 중 질병, 사자 공격으로 약 25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공사는 영국의 군사·경제적 목적이 결합된 식민지 프로젝트였다. 당시 영국은 우간다의 빅토리아호수 일대를 확보하려 했다. 철도는 경쟁 세력인 독일·프랑스·벨기에를 견제하기 위한 병력 이동에 필수였다. 내륙의 농산물·광물을 몸바사 항구로 운송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5년간의 난공사 끝에 1901년 총길이 1000㎞의 철로를 완공했다. 

그런데 1898년 케냐 차보강 인근에서 35명의 노동자가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자는 주로 새벽 2~3시경 노동자 텐트촌에 소리 없이 접근했다. 사건을 경험한 노동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새벽녘에 밖에서 뼈를 부수는 소리를 들었다. 사자가 사람을 먹어 치우는 소리였다. 그 순간 텐트 위에 무거운 것이 올라탔다. 천막이 찢어지면서 사자가 바로 옆 동료를 덮쳤다. 순식간에 그는 사자에게 끌려 나갔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고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뒤늦게 횃불을 들고 달려 나갔지만, 핏자국이 길게 그어진 흔적만을 볼 수 있었다.” 결국 2마리의 사자는 1898년 12월 영국인 패터슨에 의해 사살됐다.

중국의 지원으로 세워진 거대한 몸바사역.
중국의 지원으로 세워진 거대한 몸바사역.

 

명나라 정화 제독의 아프리카 탐사
아프리카의 시설 건립을 지원하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의 흔적은 거대한 몸바사역에서도 볼 수 있었다. 종착역에 도착해 넓은 청사 내부를 돌아보았다. 많은 승객이 몰리는 승강장 입구에서 우연히 동양인 흉상을 발견했다. 1405년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아프리카 동해안을 방문한 중국 명나라 정화 제독이었다. 아프리카와의 역사적 연계성을 강조하려는 중국의 외교 전략이다. 

정화는 모두 7번 아프리카 대륙을 방문했다. 1500톤급 갤리온선 62척, 수행선박 100여 척에 3만 명의 군인이 승선했다. 명나라 황제가 세계의 지배자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항해였다. 그러나 쇄국정책에 따라 1431년을 마지막으로 대선단의 원거리 항해는 끝나고 말았다. 반면 50여 년 후 서부 아프리카에 상륙했던 유럽은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 500년 동안 아프리카를 주름잡는 세력이 됐다. 몸바사에서 멀리 떨어진 기차역 광장은 승객이 다 채워지면 무조건 출발하는 소형 승합차들로 북새통이다. 묻고 또 물어서 포르투갈이 1596년 완공한 ‘예수 요새(Fort Jesus)’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필자 신종태는 조선대 초빙교수, 충남대·국간사 외래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세계의 전사적지를 찾아서』 등이 있다.
필자 신종태는 조선대 초빙교수, 충남대·국간사 외래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세계의 전사적지를 찾아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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