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책, 그때 그 곳
서울 계동 현대사옥, 서운관 자리였던 곳
고려 서운관서 조선 세조 관상감으로
영의정 지휘 아래 30~40명 전문 관원
하루 15차례 관측…이변 땐 즉시 보고
국가 통치 정당성 등 하늘로부터 확보
근대국가로 진입하며 1894년 폐지
왕족 사저로 쓰이다 현대그룹에 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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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서울 종로구 계동을 가로막고 선 현대사옥은 조선 시대 천문을 살피던 서운관(書雲觀) 자리였다. 이 서운관 명칭에서 창덕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 운현(雲峴)이 연유했고 흥선군의 운현궁 궁호에도 반영됐다.
서운관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하던 기관이었다. 서운(書雲)은 ‘구름(하늘)의 변화를 기록한다’는 뜻으로 『춘추좌씨전』에서 따왔다. 1434년 세종 때 경회루 북쪽에 천문관측기구 간의대를 만들었고 측우기와 해시계·물시계 등을 설치하면서 계동에도 별도 시설을 뒀다. 세조 때 관상감으로 명칭을 바꿨으나(『세조실록』) 세간에서는 계속 서운관으로 불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전소돼 1688년 숙종 때 남구만이 계동 분소에 관상감을 재건했다. 인조 이후 창덕궁이 법궁 역할을 했던 까닭에 바로 옆에 관측소를 둔 것은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을 것으로 구보는 여긴다. 조선 후기에 들어 기능이 축소되다 1894년 폐소됐다(『고종실록』 31년). 별을 살피던 관천대와 일영대(해시계 받침대)가 남아 관상감 자리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관상감은 천문을 읽어 국정에 반영하는 중요 기능을 담당했다. 기상이 하늘의 메시지라 여긴 까닭이었을 것으로 구보는 추측한다. 국가 통치의 정당성과 정책 결정의 엄숙성을 하늘로부터 확보함으로써 왕권의 절대성을 뒷받침하려 했을 터이다.
궁중 행사의 길한 시간을 정하는 일도 관상감의 주요 업무였다. 영조 35년 5월 24일에는 ‘비(妃) 간택일과 임금의 별궁 입궁 시간을 관상감에 물어 정했다’는 예조의 단자 기록이 『도청의궤』에 전한다. ‘세자의 책례 길일을 관상감이 택일했다’는 영조 12년 1월 1일의 『경모궁의궤』 기록도 전한다. 관상감 위상은 높았고 관리는 엄했다. 매년 역서(曆書)를 발행했는데, 서운관의 노복들이 위조해 만들다가 사형에 처해졌다(『심리록』, 1777년 1월). 일반인에게는 섣달그믐과 단오날 양벽부(부적)를 찍어 줬다. ‘얼굴 관상을 잘 본다’고 소문난 관상감 교수를 사대부들이 다퉈 모신(『도곡집』) 기록에서도 그 존재감이 확인된다.
관상감은 정1품인 영사(영의정이 겸임) 아래 2명의 제조를 뒀다. 첨정·판관·주부·교수 등 30~40명 정도의 전문 관원이 배치됐다. 교수는 천문학과 지리학 분야를 맡았다(『경국대전』). 구보는 ‘음양과(陰陽科) 식년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기하학과 수학에 정통했던 문광도가 천문학 교수로 근무했다’는 『명고전집』 기록에서 구성원의 높은 전문성을 읽는다. 관측은 3인 1조로 묶어 하루 15차례씩 진행하고 혜성이나 일식·월식 등 기상 이변은 밤중에도 왕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빠트리면 처벌받았다(『대전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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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실록에는 천문기상의 변화가 자주 등장한다. 지진·서리·우박·뇌우·회오리 바람·무지개 등과 일식·월식·태백성·유성 등을 기록했다. 연산군 8년 2월에는 “태백성이 대낮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거의 매일 등장한다. 천문 기상의 이상 현상은 왕권의 길흉과 관련된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민감하게 반응했다. 세종 때 일식이 예상되면 ‘변고’로 여겨 근정전에 향을 피우고 북을 치는 가운데 해의 밝음이 회복될 때까지 왕이 해를 향해 앉아 있었다(『세종실록』 ‘국조오례의’).
특히 별의 변화에 민감했다. 성변(星變)은 전쟁·반란·질병 등의 정치적 격변 징조로 해석되곤 했다. 혜성에 대한 인식은 높은 경각심을 야기했다. 1456년 세조 때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전개됐고, 1531년 중종 때는 좌의정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폐위하려다 사약을 받았으며, 1607년 선조가 죽음을 맞은 까닭이었다. 이 세 유성은 모두 서양에서 ‘핼리(Halley)’로 이름 붙여진 혜성이었다. 대략 75~76년 주기로 관측됐다.
성변이 관측되면 왕은 즉각 자성·사면령·제사 등의 대응을 보이곤 했다. 태조가 금성이 좌각성에 근접하고 혜성이 나타나는 등 별의 이상 현상이 잦자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승려들을 불러 불교의식인 ‘소재도량(消災道場)’을 벌인(『태조실록』 2년 10월 22일) 데서 확인된다. 혜성은 얼음과 먼지, 일산화탄소 등으로 구성된 천체로, 태양에 접근하면서 꼬리를 형성하는 천문 현상이다. 이런 지식 없이 하늘에 붙박이로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던 별이 붉은빛을 띠면서 꼬리를 단 채 떨어지는 모습은 옛사람들에게 기이함을 넘어 공포감을 심어줬을 것으로 구보는 짐작한다.
혜성은 영조 때인 1759년에도 관측됐는데 “모양은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나 됐으며, 빛깔은 흰색이었다(『영조실록』, 26년 1월 6일)”고 기록했다. 영조가 불화하던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있던 시기여서 ‘혜성의 출현은 천체가 보여주는 재앙의 전조이니 세자가 자숙해야 한다’는 요지의 상소가 올라왔다. 3년 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하자 사람들은 별의 경고를 더욱 무서워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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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1762~1836)만이 “역법과 사술은 분리돼야 한다”며 천문에 대한 도참사상적(圖讖思想的) 해석을 비판하고, 별의 운행 관측을 통해 바람과 비에 대한 과학적 예측이 가능함을 강조했다(『다산시문집』).
1835년에 이르러서 조선은 비로소 과학적 자세로 혜성을 대했음이 보인다. “혜성이 저녁에 나타났는데 빛은 희고 꼬리의 길이는 2척가량이었으며 북극과의 거리가 32도였다. 또 4경에 혜성이 서쪽으로 사라졌다(『헌종실록』).” 이 기록에서 차분한 관측이 감지되는 것은 북학을 통해 혜성에 관한 지식을 흡수한 까닭이었을 것으로 구보는 이해한다.
별의 신비감이 사라지면서 순조 7년 11월 나타난 핼리 혜성에 대해서는 소멸 사실만 기재했다. 별의 몰락은 관상감의 위상 약화를 의미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관상감을 폐지하고 관상소로 바꿨다. 더 이상 천문에 정치적 해석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조처로, 근대국가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관상감은 왕족들의 사저와 한 공간에 존재한 까닭에 부침을 함께 겪었다. 1906년 민영휘가 세운 휘문의숙이 계동궁과 경우궁 궁역에 교사를 신축했고, 1960년대에 계동궁이 철거되면서 1978년 현대그룹에 매각돼 그 자리에 고층 사옥이 건설됐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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