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클리스』를 읽고
완벽한 연극은 무대 뒤 스태프의 보이지 않는 분주함에서 완성된다. 화려한 조명 아래 빛나는 주연배우에게 관객의 박수갈채가 쏟아지지만, 막 뒤에서 땀 흘리는 이들의 치열함이 없다면 무대 막은 결코 오를 수 없다. 가끔 내가 하는 일이 그런 무대 뒤의 임무는 아닐까 고뇌할 때가 있다. 육군보병학교 전술담임부교관으로서 대위 지휘참모과정 장교들의 교육훈련이 원활하도록 뒤에서 계획과 통제, 평가를 준비하는 일은 화려한 조명을 받는 자리가 아니다. 어느덧 2년 차에 접어들어 보병 전술의 요람을 지키면서도 시선 밖의 묵묵한 임무가 전장에 어떤 파동을 일으킬 수 있을지 그 무거운 책임감을 스스로 되묻곤 한다.
그때 김신영의 『레클리스』를 만났다. 6·25전쟁 당시 미 해병대로 250달러에 넘겨진 제주 출신 암말 ‘아침해’의 이야기다. 무반동총(Recoilless) 소대에 배정된 뒤 그 영어 발음과 비슷한 ‘레클리스(Reckless·무모할 정도로 용감한)’라는 새 이름을 얻은 이 말의 임무는 단순했다. 산 아래 탄약 보급소에서 진지까지 포탄을 실어 나르는 것. 화려한 무대 뒤에서 묵묵히 땀 흘리는 스태프와 같은 임무였다.
1953년 3월 경기 연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네바다 전초전투에서 레클리스는 하루 51회, 56㎞의 험준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386발, 약 4톤이 넘는 탄약을 홀로 운반했다. 당시 중공군의 파상공세 속에서 미 해병1사단 5연대의 화력이 수 시간 내에 멈출 수 있었던 절박한 상황이었다. 적의 포탄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레클리스는 멈추지 않았고, 하산할 때는 부상병을 등에 업고 내려왔다. 레클리스는 직접 총을 든 주연배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가 닿지 않는 곳에서 이뤄진 이 묵묵한 탄약 보급이 네바다 전초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우리가 교범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지속지원’의 본질이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막강한 기갑부대라도 탄약과 유류 등 보급이 끊기면 고철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목격하고 있다. 교리상의 전투근무지원 원칙이 70여 년 전 말 한 마리의 걸음 속에 이미 완벽하게 구현돼 있었던 것이다.
우리 군 현장에도 수많은 레클리스가 존재한다. 새벽 4시 짙은 밤의 고요함을 깨고 아침밥을 만드는 조리병, 야간 상황실에서 뜬눈으로 24시간 부대를 지키는 당직근무자, 부대 핵심 장비의 일일점검표 빈칸을 묵묵히 채워 가는 정비병들. 전투의 최전선 영웅으로 이름이 오르내리진 않지만, 이들의 빈틈없는 지원이 없다면 부대 전투력은 단 하루도 창출될 수 없다.
레클리스는 자신이 영웅인 줄도 모른 채 묵묵히 갈 길을 갔을 것이다. 나 역시 무대 뒤에서 교육훈련을 지원하는 자리에 서 있다. 관객에게 분주함이 전달되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일과를 반복할지라도, 그 묵묵한 자리는 단순한 희생이 아니다. 그것이 곧 진짜 전투력을 창출하고 전승을 보장하는 절대적 초석이며, 가장 무거운 책임감이 깃든 영광의 최전선임을 다시금 가슴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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