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 없는 난공불락의 ‘별’…‘다윗의 돌’이 되다

입력 2026. 04. 08   15:41
업데이트 2026. 04. 08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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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사람, 그리고세계 문화유산
몰타 수도 발레타 성(聖) 엘모 요새

로도스섬서 쫓겨난 성 요한 기사단 
지중해 요충지, 몰타섬에 정착하고
각 모서리 뾰족한 별 모양 요새 구축
서지중해 노리던 오스만제국 맞서
적은 수의 용병과 합심해 물리치고
‘기독교 세력의 방패’ 명성 다시 얻어

지중해 지도를 펼쳐 놓고 몰타(Malta)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몰타가 과거 수 세기 동안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최대 쟁투지(爭鬪地)였다는 사실을 알면 얼핏 이해하기 힘들다. 몰타는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 사이, 동서 지중해를 잇는 해상 교차점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평화로울 때는 상업의 길목이었지만 전시에는 반드시 장악해야 할 전략적 관문이었다. 몰타의 수도 발레타가 198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운명이 도시 전체에 깃들어 있다.

앞선 글에서는 성지에서 밀려난 성 요한 기사단이 새로 터를 잡은 동지중해 로도스섬의 전쟁 유적을 살펴봤다. 로도스섬에 정착한 기사단원들은 얼마 후 ‘로도스 기사단’으로 불리며 도시를 정비하고 병원 구호사업을 지속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순풍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해양 기사단으로서의 성공은 얼마 후 강력한 대항마를 불러왔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성공한 오스만제국은 이후 15세기 후반 동지중해 패권을 장악한 뒤 로도스 기사단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마침내 1522년 술탄 술레이만 대제가 이끈 오스만제국 대군이 로도스를 침공하면서 결국 기사단은 섬을 떠나야만 했다. 수만 명의 오스만 병력과 최첨단 화포에 맞서 수개월을 버텼지만 결국에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기사단 운명이 다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로도스에서 패배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신의 섭리인 것처럼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로도스섬을 떠난 기사단의 다음 목적지는 바로 지중해 중앙에 있는 몰타섬이었다.

몰타 수도 발레타에 설치된 포대. 필자 제공
몰타 수도 발레타에 설치된 포대. 필자 제공


1530년 당시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가 이들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하사했다. 몰타섬 발레타에 정착한 기사단은 이곳을 요새화한 채 동지중해를 넘어 서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이슬람 세력에 맞섰다. 마침내 1565년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건곤일척의 대결인 이른바 ‘몰타 공방전’을 펼쳤다. 성 요한 기사단은 이 전투에서 엄청난 인적·물적 열세를 딛고 이슬람 침략군을 물리치면서 이후 ‘몰타 기사단’이란 이름으로 유럽에 무명(武名)을 날렸다.

왜 하필이면 전투 장소가 지중해의 작은 섬 몰타였을까? 몰타는 로도스보다 훨씬 작고 척박한 섬이었다. 기사단 내부에서도 이곳은 ‘버려진 바위섬’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전략적 가치는 막대했다. 몰타는 오스만제국의 서진(西進)을 저지할 수 있는 지중해 중앙에 자리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16세기 중반 지중해는 오스만제국과 유럽 기독교 세계 간 패권 경쟁의 최전선이었다. 당시 기세를 올리고 있던 오스만제국은 북아프리카를 거점으로 동지중해에 이어 서지중해까지 장악하려 했다. 이를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할 전략적 목표가 바로 몰타섬이었다.

마침내 1565년 오스만제국의 술레이만 대제가 몰타섬을 향해 대규모 원정에 나섰다. 규모는 무려 4만 명에 육박했고, 200척 이상의 대형 선박이 동원됐다. 이에 비해 몰타 기사단 병력은 600~700명의 기사와 6000여 명의 용병, 현지 주민이 전부였다. 특히 오스만 군대는 화력 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객관적 전력상 오스만 제국군의 승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치열하고 긴 격전 끝에 드러난 최종 승리자는 바로 몰타 기사단이었다. 이들은 오스만 대군을 물리치고 몰타섬은 물론 서유럽 기독교 세계를 수호하는 쾌거를 이뤘다.

화려하게 장식된 성 요한 공동대성당 내부. 필자 제공
화려하게 장식된 성 요한 공동대성당 내부. 필자 제공


어떻게 해서 예상과는 달리 몰타 기사단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긴 세월에 걸친 몰타 기사단의 방어시설 구축과 이의 대표 격인 성 엘모 요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몰타섬 끝자락인 마르사무셋항과 대항구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성 엘모 요새는 1552년 이래 기사단의 해상 방어체계에서 최전선 역할을 했다.

전체적으로 요새는 각 모서리가 뾰족하게 돌출된 별 모양새였다. 여기에는 약 600m에 이르는 육중한 외성벽을 따라 바다를 향해 10여 개 이상의 포대가 설치됐다. 포대별로 2~4문의 대포를 배치할 수 있었기에 해안 방어망으로는 최상이었다. 성벽은 최대 6~7m 두께로 당시 오스만 제국군의 대포 공격에도 버틸 수 있었다. 요새 내부에는 병영, 탄약고, 우물, 의약품 저장소 등 필수 시설까지 갖춰져 있었다. 한마디로 요새 자체가 자급자족이 가능한 소도시처럼 설계됐다.

실제로 몰타 대공방전은 성 엘모 요새 공략으로 불이 붙었다. 오스만 원정군으로서는 일단 이곳을 차지해야만 다음 작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요새의 방어병력은 약 150~200명에 불과했지만 성형(星形) 구조의 견고한 요새와 각종 방어시설을 활용해 1개월 이상 버티는 데 성공했다. 요새의 사수들은 포격 사각지대를 최소화하고, 해자를 이용해 오스만군의 접근을 지연시켰다. 요새에서의 결사항전 덕분에 몰타 기사단 본대는 방어 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양측은 지상전도 벌였지만 마지막에는 몰타 기사단이 오스만 침략군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다. 몰타는 함락되지 않았고, 기사단은 재차 ‘기독교 세계의 방패’라는 명성을 얻었다.

성 요한 공동대성당에 전시된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의 참수’. 필자 제공
성 요한 공동대성당에 전시된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의 참수’. 필자 제공


성 엘모 요새와 더불어 오늘날 몰타 방문객의 발걸음이 가장 많이 향하는 곳은 발레타 중심부의 성 요한 공동대성당이다. 이곳은 명실공히 기사단의 종교·정신적 심장부였다. 단순한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방마다 바로크 장식과 군사적 상징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약 60m 길이에 폭이 16m 정도로 유럽의 다른 대성당과 비교해 작은 편이지만 금박과 조각, 프레스코화 등으로 꾸며진 내부 모습은 관람자의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십자가형 평면으로 설계된 성당 내부 대리석 바닥에는 400여 명에 달하는 기사 묘비가 흡사 ‘전쟁 명부(名簿)’처럼 새겨져 있다. 특히 압권은 성당 깊숙이 걸려 있는 16세기 바로크 회화의 거장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가 그린 ‘세례자 요한의 참수’라는 작품이다. 기사단 수호성인인 세례 요한의 그림 속 순교 장면은 기사단원들이 평소 자신의 소명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표상하고 있다. 신앙을 위한 희생과 더불어 아이러니하게도 폭력과 신성함이 공존하는 세계관이 이 한 작품에 응축돼 있다.

오늘날 몰타의 수도 발레타는 집중된 군사건축 유산을 지닌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곳은 1565년 몰타 대공방전에 대한 집단 기억 위에 세워진 도시로 정의될 수 있다. 성 엘모 요새, 성 요한 공동대성당, 정연한 발레타 시가지는 각각 별개의 유산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군사·문화 체계에 가깝다. 이처럼 중세 중반기를 휩쓸었던 십자군 운동의 잔향(殘響)은 몰타에서 마지막으로 울려 퍼졌다. 그 메아리는 돌벽과 해자, 지중해의 바람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몰타는 오늘날 이곳을 찾는 방문객에게 ‘전쟁은 인간이 만든 도시와 문화에 무엇을 남기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이자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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