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히틀러와 바그너의 오페라
‘뮌헨 폭동’ 수감됐다 풀려난 히틀러
나치즘 달성 위해 반유대주의자 소환
바그너 음악, 선전선동 수단으로 활용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축제의 곡’ 선곡
군중 합창 3막 ‘잠에서 깨어나라’ 가사
독일 우월성 강조·대중 전의 고취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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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나치즘은 뮌헨에서 세력화를 시작했다. 뮌헨은 과거 강성했던 바이에른 왕국의 정서가 남아 있어 극좌·극우의 사상이 태동하고 격렬히 논쟁하는 자유로운 도시였다. 1923년 나치당의 쿠데타적 ‘뮌헨 폭동’도 이런 배경에서 벌어졌다. 수감됐던 아돌프 히틀러가 풀려나자 그와 나치당은 독일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됐다. 나치당은 뮌헨 북쪽에 있는 뉘른베르크에서 당대회를 열었다. 특히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1933년부터 매년 9월에는 약 일주일간 당대회를 하면서 나치즘의 힘을 과시했다. 그들은 당대회 기간 중 히틀러의 연설과 군대 행진, 무기 전시·행진 등을 통해 나치즘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오페라 공연과 합창, 민속 축제 등을 통해 민족주의 정서를 고취하는 활동도 했다.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히틀러는 독일인의 자긍심을 키우고 독일 우월주의를 주입해 나치즘을 달성하기 위해 바그너의 음악을 선택했다. 철저한 반유대주의자였던 바그너는 특히 독일의 게르만 신화를 토대로 극적인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바그너의 음악과 사상은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고 하나로 모으는 데 아주 유용했을 것으로 본다. 실제로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을 선택한 것에 대해 “인간의 감정을 뒤흔들 뿐 아니라 독일인의 위대함과 독일정신을 드러내주고 게르만 민족의 단결을 가져올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반유대주의자’이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바그너는 1869년 ‘음악 속의 유대주의’라는 에세이에 “유대인은 이질적인 외모와 행동 때문에 독일인에게 불쾌감을 준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들과의 접촉에서 마음이 거슬리고 언짢음을 느낀다. 그들은 고유의 말이 없고 고유의 나라도 없다. 그래서 유대인은 다른 나라의 언어를 그냥 앵무새처럼 따라 하고 예술을 모방할 뿐이며 시를 쓰거나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없다”고 적었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함께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글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바그너의 이러한 표현은 ‘근대적 반유대주의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바그너와 마이어베어, 그리고 멘델스존
바그너는 왜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갖게 됐을까? 모든 것이 다 설명되진 않겠지만 많이 회자하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유대인 작곡가 자코모 마이어베어(1791~1864),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과 관련된 내용이다. 바그너는 20대 후반에 음악 감독으로 일하던 오페라하우스가 파산해 도피하다시피 국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런던 등을 거쳐 파리로 갔을 때 당시 파리에서 ‘큰손’ 역할을 하던 마이어베어에게 재정적 도움과 함께 자신이 작곡한 ‘리엔치(Rienzi)’가 연주되도록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당시 마이어베어는 그리 탐탁게 생각하지 않았고, 바그너는 무시당하는 듯해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결국 ‘리엔치’는 1842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초연됐고, 바그너는 귀국해 궁정악장으로 활동했다. 이때부터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반유대적인 성향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유대인에게 “페스트나 다름없는 자들”이라는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1836년 바그너가 멘델스존에게 ‘C장조 교향곡’을 선물로 보낸 일이다. 그는 멘델스존이 자신의 곡을 연주하길 바랐는데, 멘델스존은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악보마저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바그너는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받고 모멸감을 느꼈었다고 한다. 이 경험에 앞서 마이어베어로부터 받았던 배신감이 더해져 증오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시대 분위기와 개인적 경험이 복합적으로 작동한 결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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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바그너 음악을 선전선동 수단으로
바그너는 가장 독일적인 게르만 신화를 이상으로 삼아 게르만 민족에게 보편적 긍지를 심어줄 오페라 음악 작곡과 이론 정립에 힘썼다. 바그너는 또 ‘전체예술’을 강조했다. 그는 “예술이란 일부 계층의 오락기구가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을 망라한 국민 전체의 예술적 표현이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근원적이며 순수한 국민적 시작(詩作) 소재는 한 시대의 성격에 사로잡히지 않고 본질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신화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하나로 결집하고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부각하기 위해 바그너를 소환했다.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사고와 게르만 신화를 소재로 한 음악을 최대한 활용했다. 집회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로 시작하고, 군대가 행진할 때는 오페라 ‘탄호이저’에 나오는 ‘순례자의 합창’이나 ‘니벨룽의 반지’ 중에서 ‘발퀴레의 기행’을 사용했다고 한다. 대체로 바그너의 음악이 장엄하고 묵직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측면에서 잘 맞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는 바그너의 오페라 중 유일한 희극이다. 『독일문학사』라는 책을 통해 한스 작스와 마이스터징거의 이야기를 알게 된 바그너가 1867년 오페라로 완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스 작스라는 실제 인물을 소재로 하고 있다. 16세기 중엽 뉘른베르크에서는 수공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모여 노래를 하고 시도 쓰는 길드(일종의 조합)로 활동했다. 그들은 매년 한두 차례씩 노래경연을 했다. 한스 작스는 바로 이 노래경연에서 대상을 받은 실존 인물로, 노래는 물론 시대를 풍자하는 시를 6000여 편 이상 쓴 사람이다. 바그너는 오페라에서 한스 작스와 뉘른베르크의 노래 경연을 소재로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했다.
뉘른베르크의 노래경연이 다가오자 우승자는 당시 금 세공사의 딸 에바와 결혼할 수 있다는 특전이 부여됐다. 이에 그녀를 사랑하는 발터라는 기사가 지원하고, 한스 작스라는 구두 명장이 그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채 발터를 도와 우승함으로써 사랑을 이루게 한다는 이야기가 오페라의 주요 내용이다. 여기서 한스 작스는 새로운 음악과 예술을 이해하는 개방적이고 현명한 인물로, 젊은 기사 발터의 파격적이고 감성적인 노래를 ‘진정한 예술’이라며 가치를 인정했다.
“잠에서 깨어나라” 외친 히틀러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의 마지막 3막 합창 부분은 신성한 독일 예술의 영광됨을 주제로 한다. 특히 한스 작스는 발터 기사를 명장이 되도록 하는 장면에서 “외국의 헛된 규칙을 신봉하면 나라가 분열되고 장인정신이 사라질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이 사라져도 신성한 독일 예술은 살아남을 것이니 진정한 독일정신을 찬양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이는 통일된 독일과 독일정신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외부 영향에 오염되지 않을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나치가 이용하기에 매우 적절했다.
히틀러는 이런 음악이 독일인의 자긍심을 크게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휘파람으로 따라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또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전당대회를 하면서 이 곡을 축제의 오페라로 택했다. 특히 히틀러는 3막에서 군중이 부르는 ‘잠에서 깨어나라’란 가사를 대중의 전의 고취를 위해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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