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저마다 남몰래 삼킨 눈물과 아물지 않은 상처, 누구에게도 침범당하고 싶지 않은 고유한 가치관이라는 거대한 ‘우주’를 품고 살아간다. 서로 다른 궤도를 외롭게 순항하던 두 행성이 우연히 다가와 곁을 내주려 할 때 크고 작은 마찰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우주의 물리법칙이다.
갈등은 두 세계가 진실하게 살을 맞대기 시작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낯설고 아픈 마찰 앞에서 너무 쉽게 길을 잃는다. 흔히 관계를 끝장내는 것은 배신이나 돌이킬 수 없는 기만 같은 극적인 사건일 거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그보다 훨씬 사소하고 서늘한 곳에 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의 차가운 온도, 피곤함을 핑계로 거둬 버린 찰나의 눈빛, 심지어 라면 하나를 두고 벌어진 실랑이가 견고했던 세계에 돌이킬 수 없는 실금을 낸다.
가장 뼈아픈 비극은 관계가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무너지는 게 아니라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서서히 폐허가 돼 간다는 점이다. 제때 다정하게 설명되지 못한 오해는 마음속에서 단단한 ‘단정’으로 굳어진다. 굳게 닫힌 마음 너머 날 선 갈등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곳엔 분노가 아니라 “제발 내 상처와 다름을 알아달라”며 울고 있는 여린 마음이 숨어 있다.
이러한 사소한 오해와 소통 부재가 빚어낸 비극은 국가 간 명운을 가르는 파국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1914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7월 위기(July Crisis)’가 그러했다. 각국 지도자들은 서로의 두려움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섣부른 단정과 소통을 거부한 외교적 침묵 속에서 상대 의도를 악의적으로 규정했다. 마주 앉아 쉼표를 찍고 숨을 골라야 할 자리에 기어이 마침표를 찍어 버린 오만한 언어는 결국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제국의 몰락으로 귀결됐다.
개인의 역사도 다르지 않다.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파국 역시 단번에 일어난 거대한 원한의 산물이 아니었다. 예술을 향한 서로 다른 궤도를 넉넉히 인정하지 못한 채 주고받은 독설, 해명되지 않은 오해의 누적, 끝내 서로를 향해 닫아 버린 마음이 빚어낸 참사였다.
그렇다면 이토록 예민하고 무방비한 관계를 우리는 어떻게 지켜 내야 할까. 관계란 가만히 둬도 유지되는 풍경이 아니라 매일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새로 지어야 하는 ‘집’과 같다. 오늘은 뿌연 창문을 정성스레 닦고, 내일은 삐걱대는 문을 고치며, 비가 새면 묵묵히 지붕을 덮어야 한다.
이 위태로운 두 세계의 경계를 잇는 유일한 다리는 결국 ‘말(言)’이다. 갈등을 이겨 내는 유일한 길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논리적 ‘승리’가 아니라 기꺼이 자존심의 한 귀퉁이를 허물고 상대를 품어 내는 ‘이해’다. 말은 내면의 상태를 비추는 거울이기에 마음이 넉넉하고 단단한 사람의 언어에는 구겨진 주름이 없다.
타인의 젖은 감정을 세밀하게 읽어 내고 나의 행동을 다듬을 줄 아는 ‘자기검색 능력’을 갖춘 이는 꾸미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깊숙이 끌어당긴다. 관계는 가만히 앉아 기다린다고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매 순간 내가 세상에 흩뿌리는 말의 품성(品性)으로 한 땀 한 땀 눈물겹게 짜 내려가는 태피스트리다.
오늘 하루 가만히 하던 일을 멈춰 보자. 붉게 물드는 해거름 아래 내 입술을 떠난 말의 온도를 조용히 되짚어 보는 일. 그 성찰의 시간은 자칫 바스러지기 쉬운 너와 나의 우주를 허물어지지 않게 끌어안는 단단한 중력으로 작동할 것이다. 관계가 선택의 거울이며 엇갈린 궤도를 품어 내는 쉼표의 언어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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