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미적 취향·유행을 넘어 자아 규정

입력 2026. 04. 06   17:02
업데이트 2026. 04. 06   17:17
0 댓글

패션&패션
패션 아이덴티티

외부세계에 발산하는 가시적인 비언어적 소통체계
계급·욕망마저 시각화…세상과 맺는 관계의 총체적 표상
중세 사치금지법부터 현재 디지털 혁명까지
과시·통제의 수단에서 자아의 갑옷이자 무기로

지난해 9월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프라다는 현대인의 다층적 정체성을 표현했다. 필자 제공
지난해 9월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프라다는 현대인의 다층적 정체성을 표현했다. 필자 제공



‘패션 아이덴티티(Fashion Identity)’라는 개념은 단순히 개인이 가진 미적 취향이나 유행의 일시적 추종을 의미하는 피상적 차원의 용어가 아니다. 복식사회학과 기호학적 관점에서 패션 아이덴티티란 한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정치·문화·경제적 환경 속에서 자아를 규정하고, 이를 외부세계에 발신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가시적인 비언어적 소통체계를 의미한다. 사람은 직물을 재단해 몸을 감싸는 행위로 계급, 직업, 정치적 신념, 내재한 욕망마저 시각화한다. 패션 아이덴티티는 개인이 세상과 맺는 관계의 총체적 표상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거시사(macrohistory)가 개인의 신체에 미시적으로 새겨지는 역사적 기록이다.

중세를 지배한 패션 아이덴티티는 ‘개인의 주체적 선택’이라기보다 ‘사회적 위치의 강제적 부여’에 가까웠다. 엄숙한 봉건사회에서 의복은 신분 이탈을 막기 위한 시각적 통제수단으로 기능했다. 당시 유럽 전역에 제정됐던 사치금지법(Sumptuary Laws)은 특정 계급만이 입을 수 있는 색상·소재, 심지어 모피 종류와 옷감 길이까지 법으로 엄격하게 규정했다.

정치권력과 부를 독점한 왕족·귀족들은 실크로드와 십자군 원정을 통해 동방으로부터 유입된 값비싼 비단, 금사로 짠 브로케이드,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붉은 빛깔을 띠는 자주색 천연염료로 뿔소랏과 일부 종의 점액으로 만들어진다)처럼 염색 과정이 극도로 까다로운 직물을 독점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성불가침한 신분 정체성을 구축했다. 반면 평민들은 거친 리넨이나 양모로 지어지고 염색되지 않은 칙칙한 색상의 튜닉을 입어야만 했다. 이 시기 의복 형태와 소재는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부여받은 계급의 굴레였다.

르네상스를 거쳐 17~18세기 절대주의 시기, 패션 아이덴티티는 왕실의 절대적 권력을 과시하는 장식주의였다. 베르사유궁전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귀족은 과장된 실루엣의 파니에(Pannier)와 숨을 조이는 코르셋, 화려한 레이스·자수로 장식된 옷을 입음으로써 육체적 노동에서 완벽하게 면제된 자신들의 경제적 우월성을 과시했다.

이런 계급 독점적 패션 아이덴티티는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을 기점으로 산산조각 났다. 혁명기 민중은 귀족의 상징이었던 무릎길이의 바지 퀼로트(Culotte)를 거부하고 노동자들의 긴바지를 입음으로써 이른바 ‘상퀼로트(Sans-culottes)’라는 강력한 정치적 패션 아이덴티티를 탄생시켰다. 이는 복식사상 처음으로 의복이 지배계급의 억압에 대항하는 이념적 저항의 상징으로 탈바꿈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으며, 의복 형태가 개인의 정치적 신념을 대변하는 도구로 진화했음을 보여 준다.

19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도래한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패션 아이덴티티의 축을 혈통 중심의 귀족에서 자본 중심의 부르주아로 완전히 이동시켰다. 이 시기 남성복은 역사상 유례없는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는데, 복식학자 존 플뤼겔이 명명한 ‘위대한 남성적 포기(The Great Masculine Renunciation)’가 도래했다.

화려한 장식과 색채를 포기하고 실용적·금욕적인 검은색 울슈트를 유니폼처럼 채택한 남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화려한 외양 대신 이성과 직업적 성취, 자본 축적에서 찾기 시작했다. 섬유산업의 기계화는 면방직업을 폭발적으로 성장시켰고, 대량생산된 직물은 더 이상 귀족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여성의 복식은 부유한 남편의 경제력을 과시하기 위한 거대한 크리놀린(Crinoline·치마를 종 모양으로 부풀리기 위해 입던 버팀대)과 버슬(Bustle·의복 뒷부분을 부풀리기 위해 만들어진 허리받이)에 갇혀 한동안 종속적 정체성을 강요받는다. 19세기 패션은 소재·형태로 자본주의적 계급 질서와 가부장적 성 역할을 극명하게 분리하고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20세기 접어들며 패션 아이덴티티는 마침내 계급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개인의 이념과 저항, 다원주의 가치를 상징하는 매개체로 폭발적 진화를 이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기능주의를 앞당겼다. 코코 샤넬은 저지(Jersey)라는 실용적 소재로 여성들에게 활동성의 자유와 독립적인 현대 여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다.

20세기 후반은 하위문화(Subculture)의 시대였다. 1960년대 모즈룩, 1970년대 펑크, 1990년대 그런지에 이르기까지 청년세대는 기성세대에 반발하며 일상적 사물을 기괴하게 재조합하는 브리콜라주(Bricolage) 방식으로 자신들만의 날카로운 부족적 아이덴티티를 구축했다. 나일론, 폴리에스터와 같은 합성섬유 발명과 기성복 산업의 팽창은 패션의 완벽한 보급을 이끌어 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신분·직업이 아니라 자신이 듣는 음악, 가치관, 동경하는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자유롭게 패션 아이덴티티를 조합하고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장했다.

오늘날 우리의 패션 아이덴티티는 디지털 혁명과 기후위기라는 전 지구적 화두 속에서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다층적이고 유동적인 국면을 맞고 있다. 인공지능(AI)과 메타버스가 일상화된 2026년 현대인에게 패션 아이덴티티는 물리적 신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상현실 속 아바타가 입는 디지털 쿠튀르와 일상생활에서 착용하는 물리적 의복 사이의 경계가 붕괴됐고, 성별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젠더 플루이드(Gender-fluid) 패션은 이제 특이한 하위문화가 아닌 보편적인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지속 가능한 바이오 소재와 업사이클링(Upcycling) 기술은 비단 윤리적 소비를 넘어 지구의 미래 환경을 걱정하는 시민이라는 세련된 형태의 패션 아이덴티티로 기능하고 있다.

2026년 봄의 시대정신과 패션 아이덴티티를 가장 정교하게 결합한 브랜드로 프라다를 빼놓을 수 없다. 프라다의 2026 봄·여름 컬렉션의 테마는 ‘보디 오브 콤퍼지션(Body of Composition)’이다. 패션은 세계와 연결돼 끊임없이 변화하고 조합되며 그 안에서 여성에게 선택과 자유, 주체성이 주어진다는 메시지다. 런웨이에는 오페라 글러브, 브라렛, 서스펜더 장식의 루즈한 시폰 스커트, 컬러풀한 태피터 버블 스커트 등 유니폼과 상반된 아이템의 조합이 반복된다. 하지만 이는 결국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설득력을 만들어 낸다. 미니멀한 카고 재킷과 1960년대풍 비즈 칼라 드레스의 대비, 레이스·실크·러플을 이어 붙인 스커트, 구겨진 듯한 태피터와 오버사이즈 재킷의 조합 역시 파편적이지만 끝내 하나의 서사를 형성한다. 프라다의 2026 봄·여름 컬렉션은 복잡한 시대 속에서 여성이 스스로 패션 아이덴티티를 선택하고 구성해 나가는 자율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복식의 역사는 인류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끊임없이 재정의하고 해방시켜 온 치열한 투쟁의 기록이다. 과거의 옷이 신분과 계급을 억압하는 철창이었다면 현대의 옷은 무한한 자아를 자유롭게 팽창시키는 부드러운 갑옷이자 무기다. 당대의 정치적 지형, 경제적 생산방식, 문화적 헤게모니는 언제나 실과 바늘로 사람들의 몸 위에 가장 먼저 그 시대의 증상을 새겼다. 패션은 결코 멈춰 있는 예술이 아니며, 인간의 몸이라는 가장 역동적 무대에서 사회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살아 숨 쉬는 유기체다. 패션 아이덴티티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절대 끝나지 않을 자아탐구의 여정이자 세상이라는 거대한 텍스트에 자신만의 문체로 남기는 가장 아름답고 강렬한 시각적 선언문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1867년 앙리 판탱라투르가 그린 ‘에두아르 마네의 초상’ 중 일부. 실크해트와 검은 프록코트를 입은 마네를 통해 전형적인 19세기 댄디즘과 부르주아 남성의 금욕적이면서도 권위 있는 이미지를 연출했다. 미국 시카고미술관 소장
1867년 앙리 판탱라투르가 그린 ‘에두아르 마네의 초상’ 중 일부. 실크해트와 검은 프록코트를 입은 마네를 통해 전형적인 19세기 댄디즘과 부르주아 남성의 금욕적이면서도 권위 있는 이미지를 연출했다. 미국 시카고미술관 소장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