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림을 내려놓을 용기

입력 2026. 03. 31   15:50
업데이트 2026. 03. 31   16:36
0 댓글

최근 종영한 ‘흑백요리사 시즌2’는 많은 감동과 재미를 줬다. 수많은 요리사가 어려움을 극복하며 다음 단계로 진출하는 장면이 흡사 전장을 연상케 했다. 각종 변수, 요리 재료의 부족, 팀원들과의 호흡, 내면의 불안감과 수면 부족 등 전투원이 전장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전투원도 전장에서 불확실성의 안개, 자원 부족, 팀워크, 개인적 불안, 수면 박탈을 겪을 수 있다.

‘흑백요리사 시즌2’의 결승전이 기억난다. 경연 제목은 ‘나를 위한 요리’였다. 2위를 한 이는 파인다이닝 셰프였다. 그는 어린 시절 먹었던 순댓국을 재해석했고, 플레이팅도 흠잡을 데 없었다. 긴장한 탓인지 정작 그는 음식을 잘 먹지 않았다.

반면 1위를 한 조림 전문가 최강록 셰프는 자신을 상징하는 ‘조림’을 내려놓고 투박한 ‘국물’ 요리를 내놨다. 준우승자의 요리처럼 화려하지도, 계산적이지도 않았다. 그 요리는 따뜻했다. 자신이 퇴근 후 편하게 먹는데 굳이 조림 요리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조림이 ‘기술’이라면 ‘국물’은 위로였다.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해 화려한 기술보다 따뜻한 온기(溫氣)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힘겨운 라운드를 돌파해 올라온 우승자와 준우승자의 요리 실력 차이는 크지 않았다. 승패를 가른 것은 스토리였다.

조림은 정확해야 한다. 불 조절이 필요하고, 간이 맞아야 하고, 타이밍이 중요하다. 기술이자 숙련이다. 군인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임무 수행의 정확성, 전투기술의 숙련도, 보고와 판단 속도, 성과 중심의 평가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우리는 늘 ‘잘해야 하는 자리’에 서 있다. 계급과 책임이 올라갈수록 조림은 더 정교해져야 한다. 그러다 보면 때론 ‘나는 누구인가’보다 ‘나는 얼마나 잘하는가’가 더 중요해진다.

그러나 사람은 조림으로만 살 수 없다. 국물로도 산다. 국물은 다르다. 완벽하지 않고 조금 싱겁거나 조금 진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온기다. 사람의 습성은 온기를 잘 기억한다. 훈련을 마친 병사가 기억하는 것은 완벽한 작전 브리핑도 있지만 추운 날 건네받은 따뜻한 커피와 컵라면, 그 국물의 추억이 오래 남는다. 강인한 리더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상관의 눈빛을 더 기억할 때가 많다. 조림은 머리에 남고, 국물은 가슴에 남았다.

전투기술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전술과 전략 없이 승리를 달성할 수 없다. 전쟁에서 2등은 곧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기에 우리를 지키기 위해 그 누구보다 예리하게 기술의 칼을 갈아야 한다.

‘조림’은 치열하게 쌓아 온 나의 강점이자 전문성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 조림을 기꺼이 내려놓을 용기가 필요하다. 항상 강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는 완벽주의, 차가운 평가로부터 잠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용기 말이다. 진짜 강한 사람은 조림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 국물을 내줄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무엇을 끓이고 있는가? 성과인가 위로인가, 평가인가 온기인가? 자신과 전우에게 따뜻한 국물 한 그릇 나눠 준 적이 있는가? 늘 타인을 위해 조려 왔던 삶의 불을 잠시 낮추고 나와 전우를 위한 국물을 끓여 낼 순 없는 것인가? 우리 모두가 조림만 잘하는 손이 능숙한 이가 아니라 자신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온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돼 공동체를 따뜻하게 만들어 가는 성숙한 군인이 되길 소망한다.

배지홍 대위 육군2포병여단 목사
배지홍 대위 육군2포병여단 목사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