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를 흔든 선율…낭만은 어떻게 파괴를 낳았나

입력 2026. 03. 31   16:25
업데이트 2026. 03. 3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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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함께하는전쟁사
제2차 세계대전 발발…바그너의 ‘로엔그린’

獨, 1차 대전 패전 후 정치적 혼돈 지속
히틀러의 극우 파시즘 ‘나치당’ 등장
최악 경제난, 유대인 탓으로 돌리며
이민족 대한 증오심, 민족주의 키워
바그너 음악에 심취해 있던 히틀러
‘백조 탄 기사’ 전설 다룬 로엔그린
국민 결집 위한 나치 연설 적극 활용

 

영국 화가 윌리엄 오펜이 그린 ‘베르사유 거울의 방에서의 평화 조약 조인’. 영국 임페리얼 전쟁박물관 소장
영국 화가 윌리엄 오펜이 그린 ‘베르사유 거울의 방에서의 평화 조약 조인’. 영국 임페리얼 전쟁박물관 소장


독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가는 바로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를 꼽을 수 있다. 바그너는 바흐, 베토벤과 함께 독일을 대표하는 음악가다. 독일 사람들이 바그너를 꼽는 이유는 아마도 독일 사람들이 잘 알고 좋아하는 중세 유럽 전설이나 게르만 신화를 작품 소재로 많이 다뤘고, 게르만 우월주의와 민족주의적인 그의 사상과 정서가 국민적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 유럽을 장악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주역 아돌프 히틀러(1889~1945)도 그의 음악에 심취했다. 히틀러는 전쟁 전 국민을 하나로 결집하는 과정에서 바그너 음악을 활용했다. 의식이나 행사는 물론 그의 연설 전후에도 바그너 음악을 방송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귀에 익숙해진 결과일 것이다.

휴전, 다시 전쟁의 빌미가 되다
전쟁 결심은 정치의 영역이다. 하지만 전쟁 수행을 위한 전략, 전술과 군사력 운용에 관한 것은 군사 분야다. 1914~1918년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2500만여 명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과 20년 만에 제2차 대전이 또 발발했다. 히틀러는 끝내 전쟁을 결심했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대전은 1945년까지 약 6년 동안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태평양에 이르는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1차 대전보다 더 강력해진 무기와 살상력으로 훨씬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기간 숨진 사람만 7500만 명 이상. 2차 대전은 어쩌면 예견된 전쟁이었을지도 모른다. 1차 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차 대전으로 독일은 인구의 약 10%를 잃었고, 폴란드·오스트리아 지역 등 독일 동부지역과 프랑스 접경지역인 알자스·로렌 등 영토의 약 15%를 빼앗겼다. 이 과정에서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진 독일 국민의 복수심이 높아졌다. 이는 게르만족 중심의 민족주의를 태동하게 했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즘의 등장
1차 대전 이후 승전국은 독일의 군대를 제한해 재건 자체가 불가능하게 했다. 예를 들면 육군본부와 총참모부를 해체하고, 육군참모총장도 없앴으며 징병제를 폐지했다. 육군은 10만 명 이상 보유를 금지하고, 해군은 1만5000명만 보유토록 했다. 공격수단으로 운용될 수 있는 전투기, 전차 등은 보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특히 1320억 금마르크라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는데, 독일의 당시 한 해 세금 수입이 60억~70억 금마르크였으니 약 20년 이상 한 푼도 쓰지 않고 배상해야 하는 액수였다. 

결국 독일은 해외에서 차관을 빌려오거나 국채를 발행해 배상금을 충당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화폐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치솟았다. 1918년 빵 한 덩이가 0.5마르크였는데, 1923년에는 1000억 마르크가 됐다.

독일 국민의 마음은 들끓기 시작했고, 경제 위기와 함께 정치적 혼돈이 지속됐다. 여기저기서 극좌·극우 정당이 생겨났다. 독일공산당은 정국을 주도하면서 바이마르공화국을 전복하려 했다. 이에 대항해 극우 파시즘 세력이 등장했는데 바로 나치당(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었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1923년 ‘뮌헨 폭동’으로 알려진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처음 주목받게 됐다. 즉, 쿠데타 실패로 투옥된 히틀러가 1년 후 석방된 뒤 반공, 파시즘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 모든 책임을 외부로
1933년 히틀러는 선거에서 다수당을 차지하고 독일 총리로 지명됐다. 1934년에는 힌덴부르크(1847~1934) 대통령이 사망하자 대통령 권한도 위임받았다. 히틀러는 “독일의 영광을 되찾자”고 외쳤고, 독일 국민은 열광했다. 독일 국민을 하나로 묶는 대독일주의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의 원인을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명확한 것은 경제적인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1차 대전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 측에서 독일에 전쟁 책임을 너무 가혹하게 요구한 것에 대한 분노가 크게 작용한 측면도 있다.

1930년대 초 경제 대공황과 전쟁배상금 지급에 따른 경제난이 최악으로 작용했다. 국민을 가장 자극하는 것이 먹고사는 문제인데, 당시 독일 사람들은 경제 상황을 심각하게 만든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독일의 금융과 언론을 장악한 유대인이 게르만 국민의 생계를 어렵게 만든다고 믿은 것이다. 또 시대적으로도 유럽은 기독교 중심의 문화로 반유대주의 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주장하는 게르만족 중심의 민족주의는 국민을 흥분시켰고 하나로 모았다. 그리고 이는 유대인, 슬라브족 등 이민족에 대한 강한 증오심으로 변화했다.

주변국 침략과 전쟁 준비
1935년 히틀러는 불평등을 이유로 베르사유조약을 폐기하고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다시 징병제를 도입하고 군대를 빠르게 재건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을 포함한 이민족을 구금하거나 폭행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일도 공공연해졌다. 독일의 확장세는 대단했다. 오스트리아를 강제 합병하고 주변의 빼앗겼던 지역을 되찾았다. 1939년 초에는 체코를 점령했다. 1938년 9월 히틀러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총리와 ‘뮌헨 협정’을 맺고 다시는 침략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주변 강대국을 안심시키고 전쟁 준비를 하는 ‘평화를 가장한 정치쇼’에 불과했다.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흔히 2차 대전 하면 떠오르는 것으로 히틀러, 나치즘, 유대인 학살, 전격전 등을 들 수 있다. 히틀러는 특히 음악이 독일 민족을 하나로 결속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중에서도 낭만주의 시기 독일의 대표적인 음악가인 바그너 사상에 심취했다. 바그너의 음악을 독일인의 우수성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예로 활용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회식도 바그너의 ‘전체 예술’ 개념에서 영감을 얻어 행사를 기획했고, 나치를 알리는 선전선동 수단으로 삼았다.

바그너의 음악과 사상에 심취한 히틀러
당시 나치는 독일 국민에게 히틀러나 당 지도부의 연설 내용을 정기적으로 알리기 위해 라디오를 많이 보급했는데 연설 방송 전에는 거의 바그너의 음악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바그너의 음악은 자연스럽게 모든 독일 국민에게 익숙해졌다. 히틀러는 젊은 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오스트리아 빈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관람하고 크게 감동해 수십 회 이상을 보러 다녔을 정도라고 전해진다. 

‘로엔그린’은 바그너가 직접 대본을 쓴 3막의 오페라다. 전설 속의 인물인 로엔그린은 백조를 탄 기사였다. 우리에게는 3막의 전주곡 직후에 나오는 ‘행진곡’과 이어지는 ‘혼례의 합창’이 유명하다.

로엔그린의 전설은 예로부터 독일과 프랑스 등에 퍼져 있었다. 바그너는 주로 독일 중세 작가인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서사시 ‘파르치팔’에 등장하는 성배 기사 전설과 옛날부터 내려오는 ‘백조의 기사’ 전설을 바탕으로 대본을 썼다. 이 전설은 빛과 어둠, 즉 선과 악의 투쟁과 호기심이 사랑을 잃게 한다는 내용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는 진정한 예술가가 세상에서 올바로 인정받지 못하는 운명을 로엔그린으로 상징화했다.

필자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필자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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